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중학교 3학년 소년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다. 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지 3일 만에 돌아가시고, ‘죽음’이란 뭘까?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밤잠을 설치며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하고, 엄마와 한 날 한 시에 죽는다면 알 수 없는 세계지만, 엄마를 꼭 껴안고 가면 되니까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인간의 끝을 알아버린 소년의 두려움이 끝난 건 대학교 1학년 때, 선교단체 한 청년의 전도를 통해서였다.
거의 매일 한인 마트 앞에 서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차용호 목사의 짧은 이야기다.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 감당할 수 없던 두려움이 넘치는 기쁨으로 바뀌었고, 이후 삶이 곧 전도가 된 건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제 37차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으로 한 해 동안 섬기게 될 차용호 목사. 그는 올해 유난히 전도를 강조하고 있다. 올 사업계획 대부분에 ‘전도’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열정이 남다르다. 전도지 40만장을 인쇄해 20만 교포 각각에게 평균 2장 씩은 돌아가게 하고 싶다는 그의 포부는 교협 임원진들과 함께 한 달에 한번 전도를 나가고, 매월 기도회를 한다는 계획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그의 전도 열정은 간헐적이 아니었다. 예수의 피로 인한 구원과 영생을 알게 된 후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그의 인생 자체가 되어버렸다.
막다른 골목에서 발견한 빛 한 줄기
중학교 3학년, 그 때 일로 인해 1년 간 우울증을 앓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럭저럭 지났지만 대학생이 되자 ‘죽음은 뭘까’에 대한 질문이 다시 떠올라 잠 못이루는 날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인하대 후문을 걸어가는데 네비게이토 소속인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예수 믿습니까? 좋은 모임이 있는 데 한 번 가보시겠어요?’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이 한번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입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들었을 지라도 놓쳐버렸을 그 진리가, 선교단체 한 멤버의 전도로 다가왔다.
“아마 B파트일 겁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을 통해 복음을 제시하는 선교 단체의 프로그램에서 저는 그동안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교회를 다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옮긴 것’이라는 현재완료형으로 되어있는 문장을 보고, 저는 오랫동안 저를 막고 있던 가슴에 어떤 것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후 차 목사는 인천 수봉공원을 중심으로 매일 전도에 몰입하게 됐다. 거듭난 진리를 알고 나니까 밥 먹는 30분도 아까웠다. 얼른 식당 밥을 해치우고 전도를 다니면서, 때로는 술에 취한 취객들도 믿고 영접하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을 만큼 그의 젊은 시절은 전도로 물들여 지고 있었다.
실신하도록 맞고 삽이 날아와도…
그러다 가게 된 군대. 그 곳은 예수님 믿기에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군종제도가 많이 약해지던 80년 대 초반이어서 더 그랬을까? 강원도 철원 산골짜기로 들어가 군종이 되기까지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호된 고생을 겪었다.
한번은 고참이 권한 술을 여러번 거절했다가, 실신하도록 맞았다. 신참 시절 제대를 앞둔 병장을 따라 교회로 외출을 나갔다가 외출증을 돌려주지 않는 병장을 빼고 혼자 돌아오다 축구를 하고 있던 장병들에게 떼거지로 밟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교회를 갔다가 ‘군기가 빠졌다’고 삽이 날아오기도 했다.
말하면 끝이 없을 군대 고생 이야기도 모두 교회로 귀결되는 그는, 군대에서도 예수에 미친 사람으로 통했다. 담을 쌓는 노동을 하다가 담배 한 개피로 휴식을 취하는 동료들 틈을 타 왼쪽 가슴에 고이 모셔둔 기드온 성경책을 읽으면 한 구절 한 구절이 꿀송이처럼 달았다. 교회를 가지 못하도록 고참들이 산 꼭대기에 위치한 중계소로 배치했을 때도 멀리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 교회를 보며 얼마나 가고 싶었는 지 모른다. 마침 부식을 타는 일을 맡게 된 차 목사는 1시간이면 될 거리를 틈만 나면 2-3시간을 돌아 교회를 찾았다. 나중에는 몸이 버티지 못하고 코피가 나기 일쑤였다. 고참들도 결국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차 목사가 교회에 마음껏 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군종으로 활동하며 교회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그는, 제대하는 날도 잊은 채 교회를 쓸고 닦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교회가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었어요. 강대상 쪽으로 경사 진 교회를 닦으려고 물을 뒤에서 촥 뿌리면 교회 전체에 물이 퍼지고, 발자국 내지 않으려고 앞에서부터 밀대로 거꾸로 쓸어내리는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그 날도 정원에 꽃 길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 때 ‘미친 놈~’ 하고 부르는 인사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오늘 집에 가는 날이야 임마’ 화들짝 놀라 인사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곳을 나오는 순간 3년 간 고생으로 복받쳤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 때 그 교회는 아직도 강원도를 지날 때면 꼭 들르고 싶은 추억과 눈물이 깃든 교회라고.
예수쟁이 목사, 생명력 있는 교회로
선교단체를 다닐 당시만 해도 공학도였던 그는, 제대 이후 고신 측 교회를 다니며 피어선신학교로 편입해 공부했다. 여차 저차 지금의 아내를 만나 89년 미국으로 온 차 목사는 센터빌에 위치한 한 한인교회 청년 사역자로 활동했다. 청년들이 늘어나고, 학생들이 장년 수보다 많아지고 교회에 활력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당시 담임 목사는 어느날 불쑥 ‘교회를 그만 뒀으면 좋겠다’고 통보해 왔다. ‘광고 하지 말고 그냥 사임하게’ 하는 말에 ‘왜’ 라는 질문이 들었지만 청년부가 불어나고 부흥하는 모습이 담임 목회자로서는 탐탁치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93년 그렇게 교회 개척을 마음 먹었지만 센터빌 근처로 하면 원래 교회에서 교인들이 이동해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멀리 루트 7번 세미나리 로드 근처에 교회를 개척했다. 센터빌에서 70마일 최고 속력으로 밟아도 4-5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교인이라고는 아내와 갓 태어난 2명의 자녀 뿐. 설교를 하다가 지루함을 느낀 아이들이 울기 시작하면 잠시 밖에 나갔다가 하늘을 보고 들어와 설교를 이어 가기도 했다. 그러다 이래선 안되겠다 생각하고 떡을 30파운드를 해 한인들이 많이 경영한다는 세탁소를 돌며 개척 소식을 알렸다.
그렇게 처음 미국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빌려 쓰던 교회의 사용이 어려워지자, 교회를 레스톤으로 옮긴 후에도 전도는 계속됐다.
처음 센터빌 교회가 없어지면서, 95년 센터빌로 다시 교회를 이전했다. 당시 주소록을 뽑아보니 주변 한인 가정은 총 1500가구. 매주 전도지나 주보를 들고 각 가정 마다 꼽는 일을 시작했다. 6개월 쯤 지나니 지도를 안 보고도 길이 훤해 핸들만 잡으면 1500가정을 돌게 됐다. 그렇게 2년 쯤 지나니 교회 안에 제직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제직이 된 사람들은, 전도를 하러 가면 문을 너무 세게 닫아 머리를 칠 뻔 했던 완고하고 핍박이 심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 해 20~30명이 세례 받으면서, 그렇게 교회는 성장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된 교회로 선교도 5군데 정도 하는 교회로 성장했을 때, 지금 있는 센터빌한인장로교회에서 제안이 왔다. 자체 성전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교인들과 함께 이전해 오기로 결심했는데 그 과정에서 반 절이 넘는 교인들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차 목사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주변 한인가정 1200가구 주소를 뽑았고 한 가정 씩 돌기 시작했다. 뽑은 지도가 너덜 너덜해 지도록 돌아다녔다.
이미 교회를 다니는 집을 제하고 나니 불신자 가정은 3가구 뿐이었지만, 그들을 모두 전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다. 그렇지만 차 목사 교회의 교인은 되지 못했다. ‘목사님, 남편이 그래도 사람 많은 교회로 가야 한다고 해서… 죄송해요.’ 마음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 하나는 굳은 차 목사는 한인마트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한인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차 목사는 거의 매일 한인마트 앞에 서서 장을 보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건넨다.
“어떤 분들은 ‘차 목사, 전도 열심히 해서 부흥하는 본을 보여 달라’며 격려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 만이 하나님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그 분이 우리 교회를 안나와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하늘에서는 또 다른 기록이 있을 것 같아요.”
당장 부흥이 되지 않아도 목회자가 전도한다는 것 자체로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 간다는 차 목사. 어떤 이들은 교회에 십일조를 꽂아 놓고 몰래 도망가듯 가버리시는 이들도 있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줘서 고마워서 일까? 가끔 음료수나 먹을 것을 건네며 격려하는 이들도 전도의 큰 활력소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차 목사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 짐도 들어드리며 어려움은 없으신 지 묻다가 거리 목회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는 인간에게 영생의 소망을 전하는 일은 꼭 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70년 80년 살고 나면 이제 ‘No More Chance’ 니까요.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믿는 자로 영원한 세계에서 살게 되니까, 거듭난 자가 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거의 매일 한인 마트 앞에 서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차용호 목사의 짧은 이야기다.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 감당할 수 없던 두려움이 넘치는 기쁨으로 바뀌었고, 이후 삶이 곧 전도가 된 건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제 37차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으로 한 해 동안 섬기게 될 차용호 목사. 그는 올해 유난히 전도를 강조하고 있다. 올 사업계획 대부분에 ‘전도’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열정이 남다르다. 전도지 40만장을 인쇄해 20만 교포 각각에게 평균 2장 씩은 돌아가게 하고 싶다는 그의 포부는 교협 임원진들과 함께 한 달에 한번 전도를 나가고, 매월 기도회를 한다는 계획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그의 전도 열정은 간헐적이 아니었다. 예수의 피로 인한 구원과 영생을 알게 된 후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그의 인생 자체가 되어버렸다.
막다른 골목에서 발견한 빛 한 줄기
중학교 3학년, 그 때 일로 인해 1년 간 우울증을 앓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럭저럭 지났지만 대학생이 되자 ‘죽음은 뭘까’에 대한 질문이 다시 떠올라 잠 못이루는 날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인하대 후문을 걸어가는데 네비게이토 소속인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예수 믿습니까? 좋은 모임이 있는 데 한 번 가보시겠어요?’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이 한번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입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들었을 지라도 놓쳐버렸을 그 진리가, 선교단체 한 멤버의 전도로 다가왔다.
“아마 B파트일 겁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을 통해 복음을 제시하는 선교 단체의 프로그램에서 저는 그동안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교회를 다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옮긴 것’이라는 현재완료형으로 되어있는 문장을 보고, 저는 오랫동안 저를 막고 있던 가슴에 어떤 것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후 차 목사는 인천 수봉공원을 중심으로 매일 전도에 몰입하게 됐다. 거듭난 진리를 알고 나니까 밥 먹는 30분도 아까웠다. 얼른 식당 밥을 해치우고 전도를 다니면서, 때로는 술에 취한 취객들도 믿고 영접하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을 만큼 그의 젊은 시절은 전도로 물들여 지고 있었다.
실신하도록 맞고 삽이 날아와도…
그러다 가게 된 군대. 그 곳은 예수님 믿기에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군종제도가 많이 약해지던 80년 대 초반이어서 더 그랬을까? 강원도 철원 산골짜기로 들어가 군종이 되기까지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호된 고생을 겪었다.
한번은 고참이 권한 술을 여러번 거절했다가, 실신하도록 맞았다. 신참 시절 제대를 앞둔 병장을 따라 교회로 외출을 나갔다가 외출증을 돌려주지 않는 병장을 빼고 혼자 돌아오다 축구를 하고 있던 장병들에게 떼거지로 밟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교회를 갔다가 ‘군기가 빠졌다’고 삽이 날아오기도 했다.
말하면 끝이 없을 군대 고생 이야기도 모두 교회로 귀결되는 그는, 군대에서도 예수에 미친 사람으로 통했다. 담을 쌓는 노동을 하다가 담배 한 개피로 휴식을 취하는 동료들 틈을 타 왼쪽 가슴에 고이 모셔둔 기드온 성경책을 읽으면 한 구절 한 구절이 꿀송이처럼 달았다. 교회를 가지 못하도록 고참들이 산 꼭대기에 위치한 중계소로 배치했을 때도 멀리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 교회를 보며 얼마나 가고 싶었는 지 모른다. 마침 부식을 타는 일을 맡게 된 차 목사는 1시간이면 될 거리를 틈만 나면 2-3시간을 돌아 교회를 찾았다. 나중에는 몸이 버티지 못하고 코피가 나기 일쑤였다. 고참들도 결국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차 목사가 교회에 마음껏 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군종으로 활동하며 교회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그는, 제대하는 날도 잊은 채 교회를 쓸고 닦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교회가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었어요. 강대상 쪽으로 경사 진 교회를 닦으려고 물을 뒤에서 촥 뿌리면 교회 전체에 물이 퍼지고, 발자국 내지 않으려고 앞에서부터 밀대로 거꾸로 쓸어내리는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그 날도 정원에 꽃 길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 때 ‘미친 놈~’ 하고 부르는 인사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오늘 집에 가는 날이야 임마’ 화들짝 놀라 인사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곳을 나오는 순간 3년 간 고생으로 복받쳤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 때 그 교회는 아직도 강원도를 지날 때면 꼭 들르고 싶은 추억과 눈물이 깃든 교회라고.
예수쟁이 목사, 생명력 있는 교회로
선교단체를 다닐 당시만 해도 공학도였던 그는, 제대 이후 고신 측 교회를 다니며 피어선신학교로 편입해 공부했다. 여차 저차 지금의 아내를 만나 89년 미국으로 온 차 목사는 센터빌에 위치한 한 한인교회 청년 사역자로 활동했다. 청년들이 늘어나고, 학생들이 장년 수보다 많아지고 교회에 활력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당시 담임 목사는 어느날 불쑥 ‘교회를 그만 뒀으면 좋겠다’고 통보해 왔다. ‘광고 하지 말고 그냥 사임하게’ 하는 말에 ‘왜’ 라는 질문이 들었지만 청년부가 불어나고 부흥하는 모습이 담임 목회자로서는 탐탁치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93년 그렇게 교회 개척을 마음 먹었지만 센터빌 근처로 하면 원래 교회에서 교인들이 이동해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멀리 루트 7번 세미나리 로드 근처에 교회를 개척했다. 센터빌에서 70마일 최고 속력으로 밟아도 4-5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교인이라고는 아내와 갓 태어난 2명의 자녀 뿐. 설교를 하다가 지루함을 느낀 아이들이 울기 시작하면 잠시 밖에 나갔다가 하늘을 보고 들어와 설교를 이어 가기도 했다. 그러다 이래선 안되겠다 생각하고 떡을 30파운드를 해 한인들이 많이 경영한다는 세탁소를 돌며 개척 소식을 알렸다.
그렇게 처음 미국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빌려 쓰던 교회의 사용이 어려워지자, 교회를 레스톤으로 옮긴 후에도 전도는 계속됐다.
처음 센터빌 교회가 없어지면서, 95년 센터빌로 다시 교회를 이전했다. 당시 주소록을 뽑아보니 주변 한인 가정은 총 1500가구. 매주 전도지나 주보를 들고 각 가정 마다 꼽는 일을 시작했다. 6개월 쯤 지나니 지도를 안 보고도 길이 훤해 핸들만 잡으면 1500가정을 돌게 됐다. 그렇게 2년 쯤 지나니 교회 안에 제직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제직이 된 사람들은, 전도를 하러 가면 문을 너무 세게 닫아 머리를 칠 뻔 했던 완고하고 핍박이 심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 해 20~30명이 세례 받으면서, 그렇게 교회는 성장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된 교회로 선교도 5군데 정도 하는 교회로 성장했을 때, 지금 있는 센터빌한인장로교회에서 제안이 왔다. 자체 성전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교인들과 함께 이전해 오기로 결심했는데 그 과정에서 반 절이 넘는 교인들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차 목사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주변 한인가정 1200가구 주소를 뽑았고 한 가정 씩 돌기 시작했다. 뽑은 지도가 너덜 너덜해 지도록 돌아다녔다.
이미 교회를 다니는 집을 제하고 나니 불신자 가정은 3가구 뿐이었지만, 그들을 모두 전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다. 그렇지만 차 목사 교회의 교인은 되지 못했다. ‘목사님, 남편이 그래도 사람 많은 교회로 가야 한다고 해서… 죄송해요.’ 마음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 하나는 굳은 차 목사는 한인마트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한인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차 목사는 거의 매일 한인마트 앞에 서서 장을 보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건넨다.
“어떤 분들은 ‘차 목사, 전도 열심히 해서 부흥하는 본을 보여 달라’며 격려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 만이 하나님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그 분이 우리 교회를 안나와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하늘에서는 또 다른 기록이 있을 것 같아요.”
당장 부흥이 되지 않아도 목회자가 전도한다는 것 자체로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 간다는 차 목사. 어떤 이들은 교회에 십일조를 꽂아 놓고 몰래 도망가듯 가버리시는 이들도 있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줘서 고마워서 일까? 가끔 음료수나 먹을 것을 건네며 격려하는 이들도 전도의 큰 활력소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차 목사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 짐도 들어드리며 어려움은 없으신 지 묻다가 거리 목회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는 인간에게 영생의 소망을 전하는 일은 꼭 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70년 80년 살고 나면 이제 ‘No More Chance’ 니까요.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믿는 자로 영원한 세계에서 살게 되니까, 거듭난 자가 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