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청계천 판자촌 일대에서 도시빈민 선교를 펼친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81) 목사가 미국을 찾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촛불처럼 자신을 녹여 세상을 비춘 '빈민의 성자'로 불리우는 그는 현재,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위치한 조그마한 시골교회 '베다니 하우스쳐치'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노무라 목사는 지난달 말 자비로 비행기를 타고 날라와 풀러신학교를 방문, 29일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청계천 빈민굴은 내게 신학교였다. 그곳 움막에서 예수를 더욱 깊이 알게 됐다”며 당시 체험을 간증으로 풀어냈다.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집 등에 얹혀 살며 외로움과 고통의 세계를 경험했던 소년 노무라. 쿄토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우연히 마을에서 재일 한국인 2명에게 '조센징'이라며 차별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에 대해 복잡한 감정과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됐다. 그 후 1950년대 한국전쟁 을 거치며 교회학교를 통해 신앙이 뿌리내렸고, 수의대 재학 시절 만난 한국인 유학생 김오남(전 전남대 교수)과의 교류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게 됐다.
이후 미국 켄터키신학교와 바이올라 신대원 유학 시절, 미국인들로부터 '잽'으로 불리우는 등 인종 차별을 겪게 되면서 문득 한국인들을 찾아 그들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그래서 1968년 한국인들을 돕고 섬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한국을 찾았다.
73년도엔 아내와 자녀 2명과 함께 제주도에서부터 DMZ(비무장지대)까지 전국 방방곳곳 소명을 실천할 장소를 찾으러 다녔다. 당시 한국은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도시는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도시 빈민이 확대 되어갔다.
그해 어느날 그는 처음 청계천에 가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악취와 소음, 공해 속에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청계천 빈민굴을 처음 목도하게 됐다. 당시 의지할 곳 없는 도시빈민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는 "인근에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이들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마음 속에서 분노가 일어났다"고 했다.
노무라 목사는 6만여 빈민들을 앞에 두고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주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주님,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노무라 목사는 자신이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오로지 그 분의 뜻에 순종하고픈 마음밖에 없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종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싶었습니다"
이것 외에는 그가 당시 빈민들을 섬긴 이유를 꼽으라면 잘 모르겠단다. 그저 그 분의 제자로서, 종으로서 나누고자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무라 목사는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삶은 배움의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되돌려야 하는지,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헌신하면서도 노무라 목사의 마음엔 늘 한국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듯 했다. 이날도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간증하면서 중간 중간에 눈시울을 붉히면서 "청계천 사람들의 가난은 우리 일본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라며 "일본 정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며 거듭 사죄의 뜻을 표했다. 그가 눈을 감고 일제강점기 짓밟혔던 한국인들의 애환을 달래듯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홍난파의 '봉선화')를 구슬프게 부르자 간증을 듣고 있던 신학생들이 하나 둘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인 보다도 더 한국인을 사랑했던 그의 눈물과 땀방울로 빈민들은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는 그렇게 빈민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노무라 목사는 그 후에도 서독과 호주를 방문해 현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빈민 아동들을 도와줄 것을 백방으로 설득했다. 그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74년부터 1994년까지 20여년간 2천여명의 아동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는 그 후 연지동에 있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작은자복지선교회 사역으로 발전했다. 또 남양만 이주 철거민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뉴질랜드를 수차례 방문해 그곳 종자 소 600마리를 수입해 인천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아래는 노무라 목사가 70년대 빈민들과 함께 하면서 사진에 담은 추억들이다. 그는 2005년 말 자신이 한때 애착을 갖고 지냈던 청계천이 복원됐다는 소식을 한국 지인을 통해 전해 듣고는 간직해온 사진과 스크랩북, 한국지도 등 826건을 2006년 2월 서울시에 무상 기부했다. 이 사진자료는 현재 국내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70년대 청계천 하류의 모습과 판자촌 거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어 청계천의 역사 뿐만 아니라 도시사, 도시빈민, 기독교 선교활동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노무라 목사 |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집 등에 얹혀 살며 외로움과 고통의 세계를 경험했던 소년 노무라. 쿄토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우연히 마을에서 재일 한국인 2명에게 '조센징'이라며 차별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에 대해 복잡한 감정과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됐다. 그 후 1950년대 한국전쟁 을 거치며 교회학교를 통해 신앙이 뿌리내렸고, 수의대 재학 시절 만난 한국인 유학생 김오남(전 전남대 교수)과의 교류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게 됐다.
이후 미국 켄터키신학교와 바이올라 신대원 유학 시절, 미국인들로부터 '잽'으로 불리우는 등 인종 차별을 겪게 되면서 문득 한국인들을 찾아 그들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그래서 1968년 한국인들을 돕고 섬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한국을 찾았다.
73년도엔 아내와 자녀 2명과 함께 제주도에서부터 DMZ(비무장지대)까지 전국 방방곳곳 소명을 실천할 장소를 찾으러 다녔다. 당시 한국은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도시는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도시 빈민이 확대 되어갔다.
그해 어느날 그는 처음 청계천에 가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악취와 소음, 공해 속에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청계천 빈민굴을 처음 목도하게 됐다. 당시 의지할 곳 없는 도시빈민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는 "인근에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이들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마음 속에서 분노가 일어났다"고 했다.
노무라 목사는 6만여 빈민들을 앞에 두고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주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주님,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노무라 목사는 자신이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오로지 그 분의 뜻에 순종하고픈 마음밖에 없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종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싶었습니다"
이것 외에는 그가 당시 빈민들을 섬긴 이유를 꼽으라면 잘 모르겠단다. 그저 그 분의 제자로서, 종으로서 나누고자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무라 목사는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삶은 배움의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되돌려야 하는지,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헌신하면서도 노무라 목사의 마음엔 늘 한국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듯 했다. 이날도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간증하면서 중간 중간에 눈시울을 붉히면서 "청계천 사람들의 가난은 우리 일본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라며 "일본 정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며 거듭 사죄의 뜻을 표했다. 그가 눈을 감고 일제강점기 짓밟혔던 한국인들의 애환을 달래듯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홍난파의 '봉선화')를 구슬프게 부르자 간증을 듣고 있던 신학생들이 하나 둘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인 보다도 더 한국인을 사랑했던 그의 눈물과 땀방울로 빈민들은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는 그렇게 빈민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노무라 목사는 그 후에도 서독과 호주를 방문해 현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빈민 아동들을 도와줄 것을 백방으로 설득했다. 그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74년부터 1994년까지 20여년간 2천여명의 아동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는 그 후 연지동에 있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작은자복지선교회 사역으로 발전했다. 또 남양만 이주 철거민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뉴질랜드를 수차례 방문해 그곳 종자 소 600마리를 수입해 인천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아래는 노무라 목사가 70년대 빈민들과 함께 하면서 사진에 담은 추억들이다. 그는 2005년 말 자신이 한때 애착을 갖고 지냈던 청계천이 복원됐다는 소식을 한국 지인을 통해 전해 듣고는 간직해온 사진과 스크랩북, 한국지도 등 826건을 2006년 2월 서울시에 무상 기부했다. 이 사진자료는 현재 국내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70년대 청계천 하류의 모습과 판자촌 거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어 청계천의 역사 뿐만 아니라 도시사, 도시빈민, 기독교 선교활동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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