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신앙인들이 말하는,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신앙적 삶의 열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훈련’이라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 영적 삶의 폭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사를 통한 이 영성을 얻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많이 강조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초대와 중세교회의 수도사들은 세속의 삶을 정리하고, 산에 들어가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경건생활은 수도원을 통해 극대화하게 되었고, 나중에 수도사들의 타락으로 수도원이 몰락할 때, 이 경건운동이 도덕적 경건으로 변질되었고, 많은 종파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사를 들여다 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항상 주류 사상과 다르게 반응하는 운동이 일어났다가 식어지거나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지적으로 치달을 때, 영성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지나친 감정을 고조시키는 영성 운동이 일어날 때, 지식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한국의 교회사도 이와 흡사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사를 들여다보면, 기도운동과 영성운동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 천당”만 외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 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종소리가 새벽을 깨웠고, 많은 기독인들이 하루를 새벽기도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80, 90년대에 들어와서 해외 유학파와 성도들이 일반적인 학력이 높아짐에 따라 ‘영성’보다는 ‘지성’을 중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류를 타고 일부 신학적 진보주의(자유주의)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악을 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또 다시 지나친 지적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수가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영성’과 ‘지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줄 압니다. ‘지성’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영성’ 없이는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성’과 ‘영성’을 겸비해서 갖추어야 합니다. 요즈음 미 주교포 사회에서도 많은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영성훈련 세미나와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일이지만 항상 지성(말씀) 없는 영성은 잘못된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이번 주말에 영성훈련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우리들의 영이 깨어야 합니다. 체험있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성(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인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