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라가려면 지금까지 나를 붙잡아두고 있던 것들을 버리고 새출발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 가령 세상 재물과 성공을 우선시하는 부모 밑에서 살고 있다면 거기서 떠나는 결단을 해야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세상을 따라가는 부모님을 둘 다 즐겁게 해드리기도 어렵다.

성경엔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고 했다. 그러나 데라와 아브라함의 나이를 비교해보면 그렇지 않다.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창11:26).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라함이 장자라면,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아버지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을 것이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까지 살았으니(창11:31), 데라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난 후에도 하란에서 60여년을 더 살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145세 된 아버지 곁을 떠났다. 그 후 아브라함이 아버지를 찾아가 뵈었다는 기록은 없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문제는 하나님이 있으냐 없느냐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직접 찾아와 말씀하셨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시대로 순종해 고향을 떠날 것인가 무시하고 조상 대대로 섬겨온 다른 신을 섬기며 그냥 살 것인가 결단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눌러 앉아 “하나님 제가 잘 믿을께요” 그랬다면, 그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믿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오늘 나에게 뭘 지시하려는지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린다. 믿음의 조상이란 말이 믿음이 가장 뛰어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처음으로 믿음이 뭔지 보여주며 믿음으로 산 믿음의 선구자, 믿음의 개척자라는 뜻이다. 처음 하는 개척은 뭐든 힘들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져야 맞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최초로 하나님을 따라간 사람이고,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을 포함해 수 많은 믿음의 선배 뒤를 따라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