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선교를 일찍 시작한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여럿 있다.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지원하고 선교지와 연락하면서 사역을 감당해 온 교회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의 그 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선교의 비전이 식어지면서 어려움에 봉착한 교회들도 보게 된다. 그 원인은 모름지기 선교사역의 진행 과정에서 많은 실패도 경험했을 것이고, 선교사들에 대한 실망도 컸을 것이다. 기대처럼 쉽게 열매가 맺히지 않았고, 투자한 것에 비해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행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다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우리 교회도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제자훈련, 셀 교회, 열린 교회, IT 교회, 새들백교회 닮기 등 많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에 관련된 세미나도 많다. 열심히 참석해 아이디어를 구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유행성이다. 교회마다 개성을 가지고 행동하면 얼마나 좋을까? 열매가 맺히려면 지속성과 함께 장애를 극복하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선교는 유행으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선교사역은 어려운 일이고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패를 하나의 과정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교를 유행으로 생각하고 다른 교회가 하니까 우리도 한다든지, 체면성에 의해 액세서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성은 때때로 일을 하다가 막히면 쉽게 포기하고 만다. 틀리면 버리기를 좋아한다.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중간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흑백의 논리라고나 할까? 선교사가 혹시 잘못되면 바로 잡아 주고 조언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동안 지원하다가 선교사가 잘못하면 잘하도록 도와줄 생각보다 하루아침에 지원을 중단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선교를 못해도 선교사는 살릴 수 있고, 선교사는 그만두어도 선교가 계속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선교는 많이 발전했을 것이다.

마가복음 2장에서 네 명의 장정들이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해 지붕을 뚫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남의 집 지붕을 뚫는 일은 정당화하기 힘든 사건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조명된 것은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낸 무리한 짓이 아니라 저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예수님이 칭찬한 부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저들의 믿음의 발로인 것이다. 이렇듯 한 영혼의 구원이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교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것이 없다면 전쟁이 아니며,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주보에 선교사들의 이름만 잔뜩 올려 놓은 교회들이 있다. 그런데 예상외로 선교사들에게 무관심하다. 우리의 사역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교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요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나팔 불기를 좋아한다. 마치 기업하는 사람들이 사회 환원이랍시고 뭉칫돈을 자선사업에 쓰긴 하지만 그 자선사업을 홍보하는 데 더 많은 경비를 쓰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곧 자선사업을 통해 회사를 홍보하고 그래서 회사를 더 키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선사업은 아무리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제 교회나 선교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 진실될 때가 되었다. 가식이나 과장 같은 유치한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교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