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구의 종말을 소재로 개봉한 영화 ‘2012’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전에도 ‘투모로우’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영화에서 ‘불가항력적 파괴’를 그렸지만, 이번만큼 스케일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2012’가 보여주는 지구의 최후는 ‘종말’이라는 단어의 느낌처럼, 약간의 종교적 뉘앙스가 가미된 철저한 파괴 그 자체다.
마야인들의 예언과 전례없던 태양의 대폭발. 서기 2012년은 우연히도 이 두 가지가 맞아떨어진 운명의 해로, 사람들은 한가로운 일상에서 예고없는 종말을 맞이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요동치는 지구를 전면에 드러내는데, 그 몰아침에는 일말의 자비조차 허락지 않는다. 운명 교향곡의 시작을 알리는 비장한 사운드는 땅을 흔들고 하늘을 울리며, 그 속에 있는 물과 불과 바람으로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을 휩쓸고 지나가 버린다. 마치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2012년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각국의 정상들은 이에 대비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이것을 알아차린 주인공 잭슨(존 쿠삭)은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인류 최후의 희망이 있는 곳, 그곳으로 향하는 잭슨과 그의 가족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장엄한 스케일의 CG(컴퓨터 그래픽)로 무장한 영화는 동시에 그 안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도 그리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가 바로 이 거대한 대재앙 앞에서 과연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 살아남으려 하는가를 지켜보는 일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또는 그 반대로 얼마나 희생적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진일보한 그래픽의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이전 영화들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 이상 기후와 외계인의 침입 등, 힘을 가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구의 파괴와 이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해운대’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말하자면 재난영화들이 갖는 하나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객들이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자연의 무서움과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고, 때론 그 과정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인 교훈을 발견케 되는 비슷한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심판에 대해 생각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투모로우’나 ‘해운대’, 그리고 ‘2012’와 같은 재난 영화들은 인간 욕망이라는 차에 액셀러레이터 뿐만 아니라 브레이크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브레이크를 밟는 주체는 누군가에겐 자연이고, 또 누군가에겐 어떤 절대적 존재일 수 있지만 크리스천들에겐 그것이 곧 하나님일 것이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알고 뛰는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의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결승점, 곧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향해 달라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 쉽게 지쳐 포기할 것이고, 또는 자기 나름의 기준에서 엉뚱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든 재난영화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재난이 닥친 후에야 공통적으로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본다. 물론 그 동안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이렇듯 지구의 종말을 그린 ‘2012’를 보면서 언젠가 맞게 될 심판을 마음 속에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크리스천다운 행동이다. 땅이 갈라져 건물들을 삼키고 해일이 일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덮쳐버리는 장면은 그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을 깨우기 충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류의 보전이 과연 무엇을 위한 보전인가 하는 물음과 관계된 질문이다. 지구의 종말을 예견한 과학자 헬슬리(치웨텔 에지오포)는 수많은 생명들이 버려지고, 결국은 선택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의 보전을 위해 인간됨을 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자연의 격변을 끊임없이 보여주던 영화가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지구와 자연이라는 유형적 상실보다 인간됨이라는 무형적 상실이 인간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고보니 베드로 사도 또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했거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다던 사도의 가르침은 최첨단 과학의 결과물인 이 영화에서조차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정말 2012년이 되면 지구에 종말이 올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분명할지 모른다. 그것은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즉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늘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영화에서처럼 0001년의 따스한 태양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다. 아마도 그 태양은, 설사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한들,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비추는 빛으로 남게 될 것 같다.
마야인들의 예언과 전례없던 태양의 대폭발. 서기 2012년은 우연히도 이 두 가지가 맞아떨어진 운명의 해로, 사람들은 한가로운 일상에서 예고없는 종말을 맞이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요동치는 지구를 전면에 드러내는데, 그 몰아침에는 일말의 자비조차 허락지 않는다. 운명 교향곡의 시작을 알리는 비장한 사운드는 땅을 흔들고 하늘을 울리며, 그 속에 있는 물과 불과 바람으로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을 휩쓸고 지나가 버린다. 마치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2012년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각국의 정상들은 이에 대비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이것을 알아차린 주인공 잭슨(존 쿠삭)은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인류 최후의 희망이 있는 곳, 그곳으로 향하는 잭슨과 그의 가족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장엄한 스케일의 CG(컴퓨터 그래픽)로 무장한 영화는 동시에 그 안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도 그리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가 바로 이 거대한 대재앙 앞에서 과연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 살아남으려 하는가를 지켜보는 일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또는 그 반대로 얼마나 희생적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진일보한 그래픽의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이전 영화들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 이상 기후와 외계인의 침입 등, 힘을 가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구의 파괴와 이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해운대’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말하자면 재난영화들이 갖는 하나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객들이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자연의 무서움과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고, 때론 그 과정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인 교훈을 발견케 되는 비슷한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심판에 대해 생각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투모로우’나 ‘해운대’, 그리고 ‘2012’와 같은 재난 영화들은 인간 욕망이라는 차에 액셀러레이터 뿐만 아니라 브레이크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브레이크를 밟는 주체는 누군가에겐 자연이고, 또 누군가에겐 어떤 절대적 존재일 수 있지만 크리스천들에겐 그것이 곧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픽의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타 재난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종교적 혹은 도덕적 교훈을 얻는다. | |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알고 뛰는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의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결승점, 곧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향해 달라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 쉽게 지쳐 포기할 것이고, 또는 자기 나름의 기준에서 엉뚱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든 재난영화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재난이 닥친 후에야 공통적으로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본다. 물론 그 동안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이렇듯 지구의 종말을 그린 ‘2012’를 보면서 언젠가 맞게 될 심판을 마음 속에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크리스천다운 행동이다. 땅이 갈라져 건물들을 삼키고 해일이 일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덮쳐버리는 장면은 그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을 깨우기 충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류의 보전이 과연 무엇을 위한 보전인가 하는 물음과 관계된 질문이다. 지구의 종말을 예견한 과학자 헬슬리(치웨텔 에지오포)는 수많은 생명들이 버려지고, 결국은 선택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의 보전을 위해 인간됨을 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자연의 격변을 끊임없이 보여주던 영화가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지구와 자연이라는 유형적 상실보다 인간됨이라는 무형적 상실이 인간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고보니 베드로 사도 또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했거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다던 사도의 가르침은 최첨단 과학의 결과물인 이 영화에서조차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정말 2012년이 되면 지구에 종말이 올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분명할지 모른다. 그것은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즉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늘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영화에서처럼 0001년의 따스한 태양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다. 아마도 그 태양은, 설사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한들,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비추는 빛으로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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