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보에 ‘건축헌금 봉헌 약정서’가 별첨되었는데 아마 어떤 분은 ‘건축헌금 봉헌 약정은 지난 부활주일에 했는데 왜 또 하라는 건가’하고 의아해 하시거나, 아니면, ‘야, 약정을 안했더니 부담을 팍팍 주는구나’ 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건축헌금 봉헌 약정서를 주보에 첨부한데에는 아주 실질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번 성전 건축에 필요한 전체 공사비는 그 절반 정도를 이미 우리가 봉헌했거나 앞으로 봉헌할 건축헌금으로 충당하며 나머지 절반 정도의 비용은 융자금을 대출받아 충당할 계획입니다.

이에 건축위원회에서는 융자금 대출을 위해 교단 융자담당실과 연락을 취하면서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융자담당실에서 준비 사항 중 두 가지를 보완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융자금 신청에 모든 봉헌자들의 서명이 담긴 약정서(한/영)를 첨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융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는 지난번 약정한 금액보다 좀 더 많은 금액의 헌금봉헌 약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위원회에서는 아직 헌금 봉헌 약정을 하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헌금 봉헌 약정을 해 주십사는 청원도 드리고, 약정하지 않고 건축헌금을 봉헌하시는 분들께는 수고스럽지만 봉헌서를 작성해 주기를 청하고, 그리고 이미 봉헌 약정을 하신 분들 중에서 혹시 조금 더 약정하실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묻기 위해 오늘 주보에 봉헌 약정서를 첨부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건축헌금 봉헌 약정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에는 더 소중한 이유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성전건축에 우리 교회 교인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라는 주님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교인으로서 교회 건축에 동참해야할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의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이번 성전 건축이 우리가 고백하고 믿는바 대로 ‘하나님께는 최고의 기쁨이요, 우리들에게는 넘치는 축복’이라면 바로 그러한 기쁨과 축복에서 그 누구도 제외되어서는 안된다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전이 건축될 것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고, 지금도 우리 교회 건축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의 확신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약속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는 목회자로서 이번 성전 건축이 우리 교인들에게 너무 버거운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누구든지 형편에 따라 동참하시라는 권유를 드렸습니다. 즉,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우리의 축복이라고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에 각자 처한 형편에 따라 경험할 수 있으면 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난 다니엘 기도 회시에 출애굽기 25장에 기록된 성막 건축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고 제 교만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그들 손으로 성막을 짓게 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있는 귀한 것들을 예물로 바치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는 중, 저를 향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 집을 짓는 일에 그렇게 네가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배려해서 형편에 따라 참여하라고 권유한다면 나는 내 백성들의 형편과 처지를 몰라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치라고 명령한 줄로 아니? 나는 내 백성이 이제 막 애굽에서부터 도망 나와 광야에서 사는 걸 몰라서 그랬는줄 아니? 그것도 한군데 정착해서 사는 게 아니라 계속 이동해야 하는 그들의 삶의 여건의 불편함과 부족함을 모르고 내 백성이야 힘들든지 말든지 나는 내 집만 지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지으라고 한 줄로 생각하니?”

“.......”

“내가 그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한 것이 그들을 위하기 때문인 줄을 왜 모르니. 나는 네가 알다시피 언제든지 어디든지 있을 수 있어, 그러나 내 백성은 그렇지가 않아,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나를 잊어버리고,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줄을 몰라.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 가운데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증거로 내 집을 지으라고 한거야. 그게 그들에게 축복이기 때문이야. 너도 정말 네가 목회하는 교인들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배려한다는 그 알량한 마음은 버려라, 그건 교인을 위해 품어야할 목사의 배려가 아니야. 그건 그들로 나의 축복에 참여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다는 방관이야. 내가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하는데 왜 그걸 모르니. 아니지. 모르지는 않지, 알고는 있지? 그렇게 믿기도 하지?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살지를 못 하는 거지. 네가 고백한대로 살어. 네가 믿는 대로 살어. 알았지?“

건축헌금 약정서를 다시 봉헌하게 된 것은 어리석은 목사를 꾸짖고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원하시는 마음이 담겨있는 주님의 배려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