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기적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경험한 기적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기적을 정의 해 본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면 어떨 것 같습니까?

국어사전에선 기적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일로 정의 합니다. 즉 하나님이나 혹은 초자적인 어떤 힘의 개입으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행위나 사건이라고 정의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기적을 본문에 의하면 두 가지로 정의 할 수가 있습니다.

(롬 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첫째 종류의 기적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생명이 끊어졌어도, 이미 시효가 다 되었어도, 부서졌어도, 허물어 졌어도, 망했어도, 다시 회생 시키실 수 있는 기적 말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기적입니다.

두 번째는 없는 것을 있는 것이 하시는 기적입니다. 첫 번째가 회복시키시는 기적이라면 두 번째는 창조적인 기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 하실 때 무에서 창조 하셨습니다. 전혀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만드신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일을 일으키시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에는 이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뭐든지 다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룹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기적이 반복해서 일어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이러한 기적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일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2장부터 22장까지의 내용을 단 몇 줄로 요약을 해놓은 것입니다. 이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은 단지 믿음의 조상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기적을 경험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의 여섯 준비의 단계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창세기 12: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기적을 일으키는 1단계 준비는 -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꿈을 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새로운 비전을 약속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기적을 경험하기 전 하나님은 꿈이나, 비전이나 목표나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서 우리의 관심이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 지도록 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말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약속을 구약이라 하고 주님 오신 이후의 약속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속을 통해서 꿈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비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바로 이 약속을 품는데서 시작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자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수많은 자손들이 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결정의 단계입니다.
창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우리는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순종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 할 것인가? 내가 이 땅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하는 결정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어떠한 목표가 생기게 되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렬이 필요 합니다. 정렬이 되지 않고는 그 목표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보니까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따나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은 것이 대략 60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란 땅에서 15년을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완전한 순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32절을 보니까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을 때 나이 70이니까 아브라함이 떠날 때에는 데라 나이 145세 로 그는 당시 생존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품음으로서 그 뜻을 위해서 뭔가를 결단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버려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잘라 내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미적 거리고 있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년이란 세월은 아브라함의 부분적인 순종으로 허비된 시간인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대기 기간을 지내는 것입니다. (Delay)
창15:1-6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왜 이것을 제가 대기기간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 본문의 약속은 12장과 약 11년이라는 공백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2장에서 받은 약속을 15장에서 똑같이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아직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또 11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주님 도대체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지요?” 왜 약속의 성취가 이리도 더딘지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기다림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되게 하기위해서 가르치셔야할 교훈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아 밖으로 나가 보거라·그리고 하늘을 보아라. 뭇별이 보이느냐?” “네 주님!”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 왜 하나님은 이 같은 일을 하셨을까요? 믿음이 성숙되는 단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우리가 꿈꾸는 것을 이미지화 혹은 영상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아브라함에게 이 같은 것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은 밤만 되면 하늘을 보면서 자신의 후손들이 이렇게 번창할 것을 기대하면서 잠자리에 들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의 아비가 된다는 것 가슴 벅찬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합당한 인격과 자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합당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서 자손만 많이 가지면 뭣합니까? 지옥이 따로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대기기간을 통해서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간 동안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 반응을 하는가 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으로 방황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창 15:8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이것은 의심의 표현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절망하면서 보낼 것입니다. 또한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포기합니다. “내 주제에 무슨 기적이야” 희망을 버립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40년을 보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널 때·아마도 하루아침이면 가나안에 갈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0년, 이건 말두 안 돼!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칩니다. 이것은 절망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은 곁길로 빠지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이 바로 이러한 곁길입니다. 약속은 받았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무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나이 86세 이젠 젊음이 그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초조하게 느낄 나이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해보려고 덤벼듭니다. 16장에 보면 그는 바로 이 곁길을 선택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사라의 제안이었지만 하갈과의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앞서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세우신 계획을 무시 하는 것이요, 결국은 잘못된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신이요, 맹신이요·미신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인내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서 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준가운데 하나가 얼마나 인내 하는가 입니다. 또한 얼마나 꾸준한가 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시간표를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중도에 길을 바꾸지 말고, 흔들지 말고·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 내가서야 할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것이 믿음의 성숙된 모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내 마음에 안 맞더라도 조금 부족하드라도·내 자리를 지켜야·복을 받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복 주시려고 하는데 그때 자리에 없으면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아무데나 가서 예배만 드리면 되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애들 학교 오늘은 이 학교 내일은 저 학교에 보내면 됩니까? 마찬가지로·교회는 아무리 많더라도 내 이름이 기록된 교회는 바로 한군데라는 것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 단계는 바로 역경을 거치는 단계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갈로부터 얻은 이스마엘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어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언약을 재확인 시키십니다. 99세 된 할아버지에게 아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손을 생산할 능력별 비유로 20대는 활화산이고 30대는 장작불이고, 40대는 화롯불 평소에는 불기가 없는 것 같은데 뒤척이면 다시 활활 타오른다나요? 50대는 담뱃불이라나요 평소엔 재만 있는데·아주 가끔씩 껌뻑 껌뻑 뜨거울 때가 있다고 해서 그런답니다. 60대는 반딧불이라나요·불빛이 있기는 있는데 도무지 뜨겁지가 않아서. 있으나 마나 하댑니다. 70대 이후는 도깨비불이라고 합니다.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도무지 본 사람이 없다나요. 그러니 99세 된 아브라함 무슨 기대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 역경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단계 주님 이제는 한계입니다. 더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이 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드는 단계입니다.

창17: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이고백은 바로 역경에 자신을 포기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포기하느냐? 그럼 이제 내가 시작할 차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걸 다한 후 손을 들면 그땐 하나님이 시작하는 단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막다른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기적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가 가진 비전 자체도 죽이는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의 꿈조차 무산 시키시는 단계입니다. 굉장히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계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아들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 때 이름하여 이삭, 그 뜻은 ‘웃음’입니다. 그런데 22장 보십시오 1-2절 그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게 웬 청청병력 같은 소리입니까? 이게 막다른 골목 아니면 무엇이 막다른 골목이겠습니까? 자그마치 40년이나 기다려 주신 아들인데, 기적의 산물인데, 이 아들을 죽이라니,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나오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시험을 하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까요? 이 마지막 테스트에서 우리가 올바로 서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기적은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적인가 하나님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축복자체냐 아니면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로마서에서 17절에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고 말씀한 배경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 좋은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막다른 길에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인 바로 기적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이러한 선택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은 기적이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해결을 주시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든 새롭게 하시는 것이든, 아님 새로운 것을 창조하시든 없던 일을 행하시든 무엇이든 간에·하나님이 해결하시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오늘 본문은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를 죽이시고 살리신 기적, 그 기적은 바로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일으키신 것이고 그것을 믿는 우리들 자신도 바로 기적이란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의 첫 번째 단계는 Dream입니다
두 번째는 Decision입니다
세 번째는 Delay
네 번째는 Difficulties
다섯 번째는 Dead End- 하나님의 시작점 입니다.
여섯 번째는 Deliverance - 해결, 기적이 임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