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자유는 언론·출판·결사·종교·거주의 자유다. 이러한 자유가 식민지하에서나 독재자 밑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식민지나 독재자를 반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자유외에도 더 중한 자유가 요구되는데 즉 죄에서 벗어나는 자유다. 이 죄는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데 욕심으로 나타난다. 새로 동생을 본 형이 사랑의 질투로 아우를 미워하고 동생은 동생대로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형을 싫어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에서와 야곱은 태중에서 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일생 싸운다. 물론 자기를 보호하고 생존하려는 본능은 이해하지만 남을 희생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기만을 위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어린이가 자라나면서 흰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욕심이라는 바탕 (화폭)에 자기가 필요한 색칠을 더해 가는 것과 같이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는 욕심 위에 더 많은 욕심을 죽을 때 까지 계속 채워가는 것이다.
묘한 것은 욕심은 가질수록 더 갖고싶은 특색이 있다. 마치 양 99마리를 가진 부자가 자기의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는 양 한 마리를 가진 초라한 노 부부의 양을 강제로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려는 부자의 욕심이 또한 나의 마음이다.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권력은 더욱 심하다. 부자지간에도 권력은 나누지 않는다. 어느 한 쪽이 없어져야 편안하게 잘수 있다. 또 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연적이 나타났다고 하면 누가 죽든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피를 봐야한다.
다음은 죽음에서의 자유다. 인류가 세상에 생기면서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지금도 오고 또 한 편에서는 가는가. 누구나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지만 예외없이 죽는다. 떠난 다음에는 잘 갔다는 연락도 지금 어떤 형편에 있다는 소식도 없다. 그러기에 죽음은 더욱 공포의 극치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그도 결국은 죽었다. 그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죽음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늘까지 해결은 못 보고있다.
위에 열거한 죄나 죽음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주신 분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인간을 처음부터 죄덩어리로 표현했다. 즉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인간으로 형성되어 자랄 때 같이 자라는 것이 죄의 속성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 본능에는 불의·탐욕·악·시기·살인·분쟁·사기·불신앙·교만·자랑·부모거역·배신·무자비 등 20 여가지가 있어서 일생동안 그 본능을 따라서 동분서주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무슨 선함이나 의로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끝까지 의인이 아닌 죄인이라고 강조한다. 나가서 죄인인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가혹하게 인간을 정죄 한 바울은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한다. 즉 조물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그의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냈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 드릴 때에 나의 죄는 용서를 받는다고 강조한다.(참고 요8:31-38;)
또 바울은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이다. 그 교리를 믿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그러면 죄(욕심)문제도 해결되고 또한 죽음에서도 자유를 얻는다.
사실 기독교인은 현재 지니고 있는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더 관심이 크다. 세계사를 다시 쓴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책의 서론에 "기독교인은 누구에게도 구속 받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누구에게나 섬기는 종이다"라고 썼다. 즉 기독교인은 주어진 자유로 내 욕심대로 하는 기회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갈5:13;) 세계인의 어머니라는 테레사 수녀의 기도 중에 "나를 해방(자유)시켜 주십시오. 남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욕심)에서, 또 남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욕심)으로부터 나를 해방(자유)시켜 주옵소서" 라고했다. 그렇다. 계속되는 욕심(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을 신앙으로 해결하고 자유인이 되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그 사람에게는 빈부 귀천의 관계없이 천국을 소유한 복된 사람이다.(눅17:21)
묘한 것은 욕심은 가질수록 더 갖고싶은 특색이 있다. 마치 양 99마리를 가진 부자가 자기의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는 양 한 마리를 가진 초라한 노 부부의 양을 강제로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려는 부자의 욕심이 또한 나의 마음이다.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권력은 더욱 심하다. 부자지간에도 권력은 나누지 않는다. 어느 한 쪽이 없어져야 편안하게 잘수 있다. 또 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연적이 나타났다고 하면 누가 죽든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피를 봐야한다.
다음은 죽음에서의 자유다. 인류가 세상에 생기면서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지금도 오고 또 한 편에서는 가는가. 누구나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지만 예외없이 죽는다. 떠난 다음에는 잘 갔다는 연락도 지금 어떤 형편에 있다는 소식도 없다. 그러기에 죽음은 더욱 공포의 극치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그도 결국은 죽었다. 그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죽음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늘까지 해결은 못 보고있다.
위에 열거한 죄나 죽음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주신 분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인간을 처음부터 죄덩어리로 표현했다. 즉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인간으로 형성되어 자랄 때 같이 자라는 것이 죄의 속성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 본능에는 불의·탐욕·악·시기·살인·분쟁·사기·불신앙·교만·자랑·부모거역·배신·무자비 등 20 여가지가 있어서 일생동안 그 본능을 따라서 동분서주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무슨 선함이나 의로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끝까지 의인이 아닌 죄인이라고 강조한다. 나가서 죄인인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가혹하게 인간을 정죄 한 바울은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한다. 즉 조물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그의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냈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 드릴 때에 나의 죄는 용서를 받는다고 강조한다.(참고 요8:31-38;)
또 바울은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이다. 그 교리를 믿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그러면 죄(욕심)문제도 해결되고 또한 죽음에서도 자유를 얻는다.
사실 기독교인은 현재 지니고 있는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더 관심이 크다. 세계사를 다시 쓴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책의 서론에 "기독교인은 누구에게도 구속 받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누구에게나 섬기는 종이다"라고 썼다. 즉 기독교인은 주어진 자유로 내 욕심대로 하는 기회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갈5:13;) 세계인의 어머니라는 테레사 수녀의 기도 중에 "나를 해방(자유)시켜 주십시오. 남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욕심)에서, 또 남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욕심)으로부터 나를 해방(자유)시켜 주옵소서" 라고했다. 그렇다. 계속되는 욕심(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을 신앙으로 해결하고 자유인이 되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그 사람에게는 빈부 귀천의 관계없이 천국을 소유한 복된 사람이다.(눅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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