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분향소건으로 매우 어려워 제가 가만히만 있을 수 없어 나의 소견을 교수님들, 학생들 위해 썼습니다. 나의 의견과 다른 의견들을 가진 분들은 원래 이 세상이라는 것이 ‘의견차이’를 갖고 사는 곳이므로 그렇게 이해해 주시고 또 혹 내가 쓴 것들이 타당성이 있다면 동감해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교목실 김형겸 목사입니다. 감히 한동의 형제 자매들께 올립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이러한 분열화가 매우 안타깝습니다. 총학의 성명에 대한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실망과 꾸중을 보면서 총학 측 학생들이 방법적이며 절차적인 면에서 분명 적절치 않은 면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 점에 대해 총학이 이번 일의 전체적 추진의 문제에 대해 신중한 반성을 해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총학의 그런 결정에 대해 좀 더 근본적 '이유'의 면에서 우리가 이해와 지지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여기에 써 보겠습니다. 우선 이것은 저의 ‘개인적 의견’임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쓰는 글에 동감할 수 없는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혹 글 내용에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저건 김형겸 목사의 의견이다’라고 여겨 버리십시오. 혹 어떤 분에게 이 글이 수구xx글로 보여 지면 이 글을 쓰는 목사가 오십중반을 훨 넘어선 자이라서 어쩔 수 없음을 알아주십시오.
저는 요 며칠 새 한국강토를 휩쓴 '분위기'에 한 기독교인으로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를 경악하게 한 것은 TV 방송사, 인터넷 포털, 신문 등의 보도와 사건에 대한 해석들이 갑자기 분 폭풍우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위인으로, 선인으로, 희생양으로 거의 우리 젊은이들의 모범이요 귀감으로 그리면서, 그것의 역으로 여당과 정부와 검찰은 악이며, 음모자들이며,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을 죽게 한 '타살자'로 그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를 매우 당황하게 한 것은 우리는 적어도 '상식'과 '이성' ‘증거’라는 것들을 중시하며 사는 존재들인데 그 상식과 이성의 선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현상입니다. 지금 누가 착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누가 정말 좀 더 fact에 입각해서 사태를 보며 분석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fact라고 알려진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은 늘 '청렴'을 자신의 제 1의 강점으로 말해왔던 대통령이었으며, 그러한 그의 강조는 서민 출신으로서 고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분의 강조이었기에 더욱 그의 매력 포인트였다는 점, 그러나 그는 재임 중 그는 부당한 뇌물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점. 서민대통령으로서 받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의 돈을 받아 미국에 있는 자녀들로 하여금 최호화 삶을 누리도록 해 주었다는 점, 너무나 큰돈이기에 퇴임 후 검찰이 조사를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검찰은 합법적 절차를 따라 사태의 진상을 추궁했다는 점, 노대통령은 윤리적, 도덕적 면에의 pressure를 심각한 수준으로 느꼈고 특히 자신의 제 1의 강점이었던 대의와 명분이 무너지면서 그는 생에 대한 의미를 더 찾지 못하고 자살의 길을 택했다는 점, 그래서 그의 자살은 개인적인 잘못된 선택이 강요한 개인적 선택의 자살이었다는 점 등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fact로 알고 있는 저이었기에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삶은 단순히 성경이 이미 수 천 년 가르쳐온 진리를 입증한 케이스 중 하나라고 생각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혹 저에게 목사쯤 돼가지고 남에게 그렇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하신다면, 저는 지금 노대통령에 대한 어떤 남이 알지 못하는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알고 있어야 할) bare fact에 대한 성경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을 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늘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 실제로 깊이 동정하며 '오죽하면 저 선택을 했을까?' 마음 아프게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의 관점에서 참 건강은 '동정'과 함께 '원칙'도 늘 가지고 씨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우리에게 병을 주는 해악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규명하는데서, 즉 죄는 죄로, 악은 악으로 분명히 identify하는 데서 사랑도 사랑이 된다고 저는 압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을 베풀기 전 ‘남편문제’를 제기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노대통령과 가룟유다의 죽음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면에서 유사합니다.
1) 두 사람 모두 부당한 돈에 대한 욕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요한복음은 유다가 '도적'이었다고 함. 요 12:6)
2) 두 사람 모두 어느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감당 못할 선까지 나아갔다.
3) 두 사람 모두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종결을 지었으며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었다.
위와 같이 성경의 조명을 중심으로 노대통령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저로서 장례일정을 중심으로 한 수백만 대중의 노대통령 영웅화, 의인화, 희생양화의 물결에 심히 기독교적 가치에 반하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이제 한국은 도덕이니, 원칙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들은 신경쓰지 말고 기분과 정서가 이끄는 대로만 살자”는 식의 대중 에너지였습니다. 로켓과 부풀은 풍선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둘 다 추진력이라는 에너지를 가졌는데 차이는 전자는 ‘이성적 방향’을 가졌다는 것이고 후자는 방향 없는 발산하는 에너지만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대중이 뿜어내는 노랑색의 에너지에서 슬프게도 ‘이성’보다는 ‘격정’을, 도의적 원칙보다는 감상주의를 보았습니다. 방송사들, 인터넷 포털들, 신문들 등의 언론들이 함께 제 눈에는 엄청난 에너지로 튕겨 움직이는 ‘풍선’이었습니다. 저를 매우 놀라게 한 것은 이러한 언론들이나 에너지에 찬 대중 모두 노대통령에 대한 어떤 식의 ‘비판적 언급’이 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도 ‘원칙’ 문제를 피력하는 글들을 어디에 올리기가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큰 용기를 갖고 내어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를 했는데 대학교에 분향소 하나 설치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국가의 원수의 죽음을 국민인 우리가 함께 슬퍼해 드리자는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노대통령의 case는 기독교인인 저에게 단순한 분향소 설치여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영웅화, 의인화, 희생양화 되어 질 수 없는 사람을 그렇게 치켜 올려놓고 나서 그의 분향소를 설치하자는 것은 저에게는 진리와 거짓을, 선과 악을 섞자는 것이며 원칙과 무질서를 섞자는 것으로 외 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이데올로기적 정서로 ‘순수한 노랑색’으로 페인트된 사람에 대해 분향소를 설치하자는 것이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채색의 운동이 그렇게 강하지만 않았어도 저도 생각이 달랐을 것입니다.
물론 노대통령이 참으로 영웅이며 희생양이라고 진정으로 믿는 분들은 제 말에 동의할 수 없겠습니다마는, 저는 노대통령이 결코 내가 가르치는 ‘기독교인 제자들’에게 영웅이요 희생양으로 지적해 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그 분을 개인적으로 불명예스럽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복음도 모른채 큰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큰 죄를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이런 언급들은 단지 진과 위를 끊임없이 구분해야 하는 작업을 싫건 좋건 해야만 하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노대통령의 공인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기독교의 조명에서 그르며 어떻게 바른지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별화의 일이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사회의 질서에 직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역사를 잊는 자는 역사를 반복한다고 말입니다.
키엘케고르(Soren Kierkegaard)라는 덴마크 기독사상가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러 모리아산에 가는 것을 보며 teleological suspension of ethics란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키엘케고르가 말하는 ethics는 문화 속의 ‘인륜적 도리’입니다. 말하자면 ‘분향소 설치해서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우해 드리자’ 식의 도리입니다. 그런 도리는 우리의 ‘문화적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키엘케고르는 어떤 때, 우리가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문화적 조건과 인륜을 뛰어 넘는 어떤 방향과 결정을 향하여 부르실 때, 우리는 모리아산을 향해 걷던 아브라함처럼 문화적 인륜을 뒤로하고(suspend) 하나님의 목적(teleological goal)을 향해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금번 총학의 결정은 제 관점에서는 그런 결정이었으며 그런 행동이었다고 여기 김형겸 목사는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 방법과 절차에 clumsy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와 완전치 못한 처리가 우리 모두 배워나가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겉으로 나타나는 면들보다는 ‘속 동기’를 보려고 합니다. 제 신앙양심에 총학의 금번 행동은 ‘동기’에서 자신들의 명예나 성과주의의 추구에서보다는 ‘기독교적 양심의 고통’에서였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 자체를 저는 귀히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한동의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한동대학교에서 매일 입이 아프도록, 그리고 귀가 따갑도록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직’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원칙주의와 가치관의 중요성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그 배운 것을 put into practice하기 위해 YES해야 할 것과 NO해야 할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가치들은 이론만은 아닙니다. 금번 총학은 하필 올해 총학이 되어 매우 어려운 문제에 대한 ‘가치관적 결단’을 해야만 했고 그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총학도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매끈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그들의 자리에 그 결정을 했어야만 한다면 나는 얼마나 완전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교목실 목사로 있는 부족한 이 종이 한동 공동체에 대한 간곡한 부탁을 감히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학교에서 그렇게 함께 중요하게 여기며 기치를 높이는 정직과 말씀에 근거한 원칙주의를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참으로 그들 옆에 서 주어야 할 사람은 한동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금번 총학이 그런 ‘연습’을 해 보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자주 넘어지고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 거기에 주님을 향한 집중이 분명했기에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거룩한 결정’을 더욱 잘 해나가는 성숙한 주의 종들이 되도록 계속 도와주셨습니다. 잘못은 잘못으로 지적해 줍시다 (그것도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바른 동기’의 ‘바른 고민’과 ‘바른 거룩한 고통’은 서로 동감해 주며, 서로 눈을 맞추며 나아갑시다. 저 제자들이 매우 clumsy했고 무지했고 나약했어도 그들은 ‘주님을 순종하는 법’ 배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들을 ‘역사를 바꾸는 주역’으로 쓰셨습니다.
한 공동체가 망하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 원칙을 절대화하여 그것이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원칙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의 원칙부재론입니다. 유일한 생명의 길은 '바른 원칙'에 대한 추구와 발견과 적용입니다. 한동의 학생 여러분들게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성경이 선언할 때 결국 기독교인은 ‘바른 원칙’을 위해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자들임을 압시다. 그 길만이 나 개인이, 우리 학교가,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가 사는 길임을 압시다. 그리고 혹 실패하고 실수하더라도 ‘하나님의 원칙’을 찾아나가는 ‘몸부림’을 계속하는 것을 그치지 맙시다. 그것이 한동과 다른 학교를 다르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교목실 김형겸 목사 드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16-19)”
교목실 김형겸 목사입니다. 감히 한동의 형제 자매들께 올립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이러한 분열화가 매우 안타깝습니다. 총학의 성명에 대한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실망과 꾸중을 보면서 총학 측 학생들이 방법적이며 절차적인 면에서 분명 적절치 않은 면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 점에 대해 총학이 이번 일의 전체적 추진의 문제에 대해 신중한 반성을 해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총학의 그런 결정에 대해 좀 더 근본적 '이유'의 면에서 우리가 이해와 지지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여기에 써 보겠습니다. 우선 이것은 저의 ‘개인적 의견’임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쓰는 글에 동감할 수 없는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혹 글 내용에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저건 김형겸 목사의 의견이다’라고 여겨 버리십시오. 혹 어떤 분에게 이 글이 수구xx글로 보여 지면 이 글을 쓰는 목사가 오십중반을 훨 넘어선 자이라서 어쩔 수 없음을 알아주십시오.
저는 요 며칠 새 한국강토를 휩쓴 '분위기'에 한 기독교인으로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를 경악하게 한 것은 TV 방송사, 인터넷 포털, 신문 등의 보도와 사건에 대한 해석들이 갑자기 분 폭풍우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위인으로, 선인으로, 희생양으로 거의 우리 젊은이들의 모범이요 귀감으로 그리면서, 그것의 역으로 여당과 정부와 검찰은 악이며, 음모자들이며,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을 죽게 한 '타살자'로 그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를 매우 당황하게 한 것은 우리는 적어도 '상식'과 '이성' ‘증거’라는 것들을 중시하며 사는 존재들인데 그 상식과 이성의 선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현상입니다. 지금 누가 착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누가 정말 좀 더 fact에 입각해서 사태를 보며 분석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fact라고 알려진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은 늘 '청렴'을 자신의 제 1의 강점으로 말해왔던 대통령이었으며, 그러한 그의 강조는 서민 출신으로서 고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분의 강조이었기에 더욱 그의 매력 포인트였다는 점, 그러나 그는 재임 중 그는 부당한 뇌물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점. 서민대통령으로서 받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의 돈을 받아 미국에 있는 자녀들로 하여금 최호화 삶을 누리도록 해 주었다는 점, 너무나 큰돈이기에 퇴임 후 검찰이 조사를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검찰은 합법적 절차를 따라 사태의 진상을 추궁했다는 점, 노대통령은 윤리적, 도덕적 면에의 pressure를 심각한 수준으로 느꼈고 특히 자신의 제 1의 강점이었던 대의와 명분이 무너지면서 그는 생에 대한 의미를 더 찾지 못하고 자살의 길을 택했다는 점, 그래서 그의 자살은 개인적인 잘못된 선택이 강요한 개인적 선택의 자살이었다는 점 등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fact로 알고 있는 저이었기에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삶은 단순히 성경이 이미 수 천 년 가르쳐온 진리를 입증한 케이스 중 하나라고 생각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혹 저에게 목사쯤 돼가지고 남에게 그렇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하신다면, 저는 지금 노대통령에 대한 어떤 남이 알지 못하는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알고 있어야 할) bare fact에 대한 성경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을 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늘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 실제로 깊이 동정하며 '오죽하면 저 선택을 했을까?' 마음 아프게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의 관점에서 참 건강은 '동정'과 함께 '원칙'도 늘 가지고 씨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우리에게 병을 주는 해악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규명하는데서, 즉 죄는 죄로, 악은 악으로 분명히 identify하는 데서 사랑도 사랑이 된다고 저는 압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을 베풀기 전 ‘남편문제’를 제기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노대통령과 가룟유다의 죽음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면에서 유사합니다.
1) 두 사람 모두 부당한 돈에 대한 욕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요한복음은 유다가 '도적'이었다고 함. 요 12:6)
2) 두 사람 모두 어느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감당 못할 선까지 나아갔다.
3) 두 사람 모두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종결을 지었으며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었다.
위와 같이 성경의 조명을 중심으로 노대통령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저로서 장례일정을 중심으로 한 수백만 대중의 노대통령 영웅화, 의인화, 희생양화의 물결에 심히 기독교적 가치에 반하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이제 한국은 도덕이니, 원칙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들은 신경쓰지 말고 기분과 정서가 이끄는 대로만 살자”는 식의 대중 에너지였습니다. 로켓과 부풀은 풍선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둘 다 추진력이라는 에너지를 가졌는데 차이는 전자는 ‘이성적 방향’을 가졌다는 것이고 후자는 방향 없는 발산하는 에너지만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대중이 뿜어내는 노랑색의 에너지에서 슬프게도 ‘이성’보다는 ‘격정’을, 도의적 원칙보다는 감상주의를 보았습니다. 방송사들, 인터넷 포털들, 신문들 등의 언론들이 함께 제 눈에는 엄청난 에너지로 튕겨 움직이는 ‘풍선’이었습니다. 저를 매우 놀라게 한 것은 이러한 언론들이나 에너지에 찬 대중 모두 노대통령에 대한 어떤 식의 ‘비판적 언급’이 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도 ‘원칙’ 문제를 피력하는 글들을 어디에 올리기가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큰 용기를 갖고 내어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를 했는데 대학교에 분향소 하나 설치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국가의 원수의 죽음을 국민인 우리가 함께 슬퍼해 드리자는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노대통령의 case는 기독교인인 저에게 단순한 분향소 설치여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영웅화, 의인화, 희생양화 되어 질 수 없는 사람을 그렇게 치켜 올려놓고 나서 그의 분향소를 설치하자는 것은 저에게는 진리와 거짓을, 선과 악을 섞자는 것이며 원칙과 무질서를 섞자는 것으로 외 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이데올로기적 정서로 ‘순수한 노랑색’으로 페인트된 사람에 대해 분향소를 설치하자는 것이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채색의 운동이 그렇게 강하지만 않았어도 저도 생각이 달랐을 것입니다.
물론 노대통령이 참으로 영웅이며 희생양이라고 진정으로 믿는 분들은 제 말에 동의할 수 없겠습니다마는, 저는 노대통령이 결코 내가 가르치는 ‘기독교인 제자들’에게 영웅이요 희생양으로 지적해 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그 분을 개인적으로 불명예스럽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복음도 모른채 큰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큰 죄를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이런 언급들은 단지 진과 위를 끊임없이 구분해야 하는 작업을 싫건 좋건 해야만 하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노대통령의 공인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기독교의 조명에서 그르며 어떻게 바른지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별화의 일이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사회의 질서에 직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역사를 잊는 자는 역사를 반복한다고 말입니다.
키엘케고르(Soren Kierkegaard)라는 덴마크 기독사상가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러 모리아산에 가는 것을 보며 teleological suspension of ethics란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키엘케고르가 말하는 ethics는 문화 속의 ‘인륜적 도리’입니다. 말하자면 ‘분향소 설치해서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우해 드리자’ 식의 도리입니다. 그런 도리는 우리의 ‘문화적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키엘케고르는 어떤 때, 우리가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문화적 조건과 인륜을 뛰어 넘는 어떤 방향과 결정을 향하여 부르실 때, 우리는 모리아산을 향해 걷던 아브라함처럼 문화적 인륜을 뒤로하고(suspend) 하나님의 목적(teleological goal)을 향해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금번 총학의 결정은 제 관점에서는 그런 결정이었으며 그런 행동이었다고 여기 김형겸 목사는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 방법과 절차에 clumsy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와 완전치 못한 처리가 우리 모두 배워나가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겉으로 나타나는 면들보다는 ‘속 동기’를 보려고 합니다. 제 신앙양심에 총학의 금번 행동은 ‘동기’에서 자신들의 명예나 성과주의의 추구에서보다는 ‘기독교적 양심의 고통’에서였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 자체를 저는 귀히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한동의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한동대학교에서 매일 입이 아프도록, 그리고 귀가 따갑도록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직’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원칙주의와 가치관의 중요성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그 배운 것을 put into practice하기 위해 YES해야 할 것과 NO해야 할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가치들은 이론만은 아닙니다. 금번 총학은 하필 올해 총학이 되어 매우 어려운 문제에 대한 ‘가치관적 결단’을 해야만 했고 그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총학도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매끈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그들의 자리에 그 결정을 했어야만 한다면 나는 얼마나 완전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교목실 목사로 있는 부족한 이 종이 한동 공동체에 대한 간곡한 부탁을 감히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학교에서 그렇게 함께 중요하게 여기며 기치를 높이는 정직과 말씀에 근거한 원칙주의를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참으로 그들 옆에 서 주어야 할 사람은 한동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금번 총학이 그런 ‘연습’을 해 보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자주 넘어지고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 거기에 주님을 향한 집중이 분명했기에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거룩한 결정’을 더욱 잘 해나가는 성숙한 주의 종들이 되도록 계속 도와주셨습니다. 잘못은 잘못으로 지적해 줍시다 (그것도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바른 동기’의 ‘바른 고민’과 ‘바른 거룩한 고통’은 서로 동감해 주며, 서로 눈을 맞추며 나아갑시다. 저 제자들이 매우 clumsy했고 무지했고 나약했어도 그들은 ‘주님을 순종하는 법’ 배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들을 ‘역사를 바꾸는 주역’으로 쓰셨습니다.
한 공동체가 망하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 원칙을 절대화하여 그것이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원칙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의 원칙부재론입니다. 유일한 생명의 길은 '바른 원칙'에 대한 추구와 발견과 적용입니다. 한동의 학생 여러분들게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성경이 선언할 때 결국 기독교인은 ‘바른 원칙’을 위해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자들임을 압시다. 그 길만이 나 개인이, 우리 학교가,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가 사는 길임을 압시다. 그리고 혹 실패하고 실수하더라도 ‘하나님의 원칙’을 찾아나가는 ‘몸부림’을 계속하는 것을 그치지 맙시다. 그것이 한동과 다른 학교를 다르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교목실 김형겸 목사 드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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