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에 시애틀에 도착했습니다. 연세대를 2월에 마치고 9월에 시애틀에 도착해서 커클랜드에 있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왔기 때문에 학사편입해서 2년을 공부하고 마친후에 spu에 가서 성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하는 죽음의 문화와 사회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바라보면서 지금도 여러분을 찾고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의 영혼을 살리는 역사에 동참하고 싶으신 또한 동역하고 싶으신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여성의 특권이 있습니다. 또한 무한한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시켜 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억만가지 일 중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많이 닮은 일입니다. 모성을 지닌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이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잠재력을 여성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향해 기대를 가지고 계시며 거룩한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오늘날 여성은 그 역할을 감당해주어야만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도 폭력에 시달리고 힘의 세력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불행한 비극을 맞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를 살면서 특별히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도력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지도자들로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여러분 소원이고 제 소원인 줄 믿습니다.
어느 치열한 전쟁에서 병사들은 잠시 휴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장교가 자신은 피가 흐르기 때문에 매우 심한 갈증이 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를 본 위생병이 정말 최후의 순간을 위해 준비한 비상용 수통을 가지고 와서 부상입은 장교에게 주었습니다. 이 장교가 이 수통을 받아 마시려고 하는 순간 그곳에 있는 군인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부대원 전체가 똑같이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교는 먼저 소대장에게 수통을 건냈습니다. 소대장이 물통을 받고 잠깐 생각하다가 물통에 입을 대고 마시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통을 장교에게 주었습니다. 장교가 반갑게 물을 받아든 순간 소대장이 전혀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장교도 물 마시는 시늉을 하고 옆에 있는 병사에게 넘겼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이 수통을 받았지만 물을 마시진 않았는데 신기하게 한명도 목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붉은 물을 주사에 넣어서 감자에 주입하면 감자 전체가 붉게 된다. 리더가 취하는 행동은 마치 물감처럼 그들과 함께 있는 조직원에게 스며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크리스천들은 나만 살고 나만 새생명 얻어서 천국에 들림받기 위해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나눔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살려나갈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요, 하늘 나라의 대사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칭해주시면서 우리의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 뿐 아니라 온 새상에 일어나느 불행한 일의 자취를 보면서 한 지도자의 능력과 지도력이 인류의 생존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과 감격, 소망을 줄 수 있는 건강하고 바른 지도력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지도력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때까지 지도력을 오해해왔습니다. 힘이나 지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강한 힘이나 권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자기 뜻을 펼치며 사람들을 자리나 위치로 끌고갈 수 있는 사람을 지도자 혹은 지도력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20세기 동안 그런 역사가 이어져왔고 이 사회는 힘에 의존하고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위에 의존하는 이런 지도력,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힘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상대자를 꺾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기뿐 아니라 조직 전체를 망가뜨리는 역사를 수없이 보아왔다.
힘의 지도력은 함께 묶어주신 이웃과 내가 섬겨야 할 사회를 내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저들보다 내가 더 강해지고 내가 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는 자리에 올라갈까를 고심하게 됩니다.
지도력을 통해 도움이 되기 보다는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파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지도력에은 살리는 지도력이 있고 죽이는 지도력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지배해온 지도력은 무너뜨리는 지도력이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필요한 지도력은 보살피고 품고 세워주는 모성적인 리더쉽이며 힘에 의존했던 남성적인 지도력이 아니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여성 지도력만이 21세기 이후에 세상을 살려낼 수 있고 유지시킬 수 있는 지도력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도력은 영향력입니다. 처음 소개한 이야기에서 장교가 자기도 목이 마르지만 다른 자기의 부하들을 생각하면서 물 마시는 시늉만했지 마시지 않았던 희생과 사랑의 지도력이 부대 전체가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모두가 목이 마르지 않는 결과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 지도력이 영향력입니다. 나도 저렇게 되야지,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바로 영향력은 여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존경하게 될 때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될 때 리더의 위치가 바로 서게 되고 주변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곳에서 참된 지도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말하는 영향력, 지도력은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지도력이 형성됐습니다. 너보다는 내가 한단계 올라가면서 지도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향력이 지도력이 되는 이 시대에는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지도력이 형성됩니다. 지도력은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모든 활동이 지도력이 됩니다. 지도력은 한 사람의 행동이나 가치관, 생활과 삶에 변화를 끼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여러분과 나를 새롭게 만듭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내 가치관이 변해지고 질서가 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출세를 할까를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이제는 내 위에 네가 오고 하나님이 오는 질서가 달라지는 변화를 가져올까를 고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의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항 지도력, 가장 강한 영향력을 인류 역사에 우리에게 끼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제자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지도력은 기능이나 학위가 아닙니다. 그런것은 도움은 되지만 지도력은 절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지도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개인에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그룹의 조직에 영향력을 끼치는 모든 과정을 기독교적 지도력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은 영향력을 끼치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도력이라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하나님을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그 노력 전체를 지도력이라고 한다.
가장 위대한 지도력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복음서를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위대한 지도력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평양에 갔더니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라고 적혀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라고 사람 이름이 수없이 써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치고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표현하시기를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표현하는 지도력은 종입니다. 이 세상의 지도력과 성서의 지도력은 얼마나 정반대인지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하고 싶으면 섬겨라.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고 말했습니다. 머리가 내리는 모든 지시는 몸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야 할 참다운 몸, 참된 지도력의 모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하와를 아담의 돕는 베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있고 사람이 다스리는 물질이 있는 것이 창조의 처음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위에 서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인간의 모든 범죄의 시작입니다. 교만과 욕심이 인간의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다스린다는 단어가 보살피고 보호하는 관계에서 지배하는 의미로 바뀐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판단력과 분별력이 달라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회학자들은 여성지도자들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내 삶의 영향력이 이웃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내 안에 타는 성령의 불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절망의 세상 가운데 하늘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영향력은 교만으로 인해서는 드러나지않습니다.
21세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사탄이 가장 즐겨쓰는 장애물은 인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해서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인의 본질입니다. 죽으면 천국 갈 수 있게 해주는 길, 세상에서 힘들 때 위로해주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행해야 하는 지도력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모르는 진리, 알지 못하는 것을 내 삶을 통해서 저들에게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깨소금의 고소함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직접 먹어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지도력은 말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한 영량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은 본받고 책임과 역할은 경시하고 방치하고 혹시 우리가 거꾸로 사는 21세기 크리스천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는 고백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표현보다 더 큰 뜻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제자고 예수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걸음걸음은 예수를 닮아가는 걸음입니다. 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바로 예수 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힘있는 지도력은 가장 예수 닮은 자, 가장 스승께 기쁨이 되는것은 가장 스승을 많이 닮은 제자인 것입니다.
제 동생이 피아니스트입니다. 제자들이 많습니다. 대학입시 때 커튼을 쳐놓고 시험을 봅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연주를 시작하면 누구 제자인지 바로 안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를 보고 스승이 누구인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옷 입는 것, 웃는 모습 하나를 보면서 예수를 닮았구나, 크리스천이라고 까지 안해주면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을 수는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지도력, 예수를 스승으로 모신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이런 삶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성 지도력의 중요성과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와는 돕는 자입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현숙이라는 단어은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능력을 발휘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칭찬받고 자녀에게 칭송받고 성 밖에서까지 칭송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것이 학력이건, 성격이건, 시간이건 무엇이든지, 나에게 주신 것을 보다 더 활발하게 개발하고 발휘해서 내 몫을 다하는 여성, 다 없어지지만 이 현숙한 여인,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서, 잠언서 3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이 바로 여성의 지도력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거니와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 손으로 집을 허문다고 했습니다. 집이라는 것은 가문, 가풍, 자녀를 이야기합니다. 누가 가정을 세웁니까. 여인이 세웁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관계도 세우고, 관계도 세우고 자녀도 세우며 무너진 경제도 세웁니다. 한 가정의 수준은 아내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자녀의 수준은 어머니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한 국가의 수준은 여성들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의 삶의 질, 여성의 가치관, 여성의 삶의 태도, 여성의 삶의 모습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온 인류의 반 이상이 여성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훨씬 더 많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여성들의 자질과 여성들의 지도력을 무시하고 방치하는 것은 사회 조직과 국가의 가능성을 절반으로 깎는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후 쯤에는 세계적인 기업의 CEO가 여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급변하는 기계 문화 속에서 황금 만능주의, 이런 가치관에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너무 분주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들은 모두 지쳤습니다. 고단하고 상처입고 병들어 입습니다. 감성이 병들고 모르는 사이에 영성이 다 죽어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 무엇인가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닮은 품성, 품을 수 있고 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지도력, 보살피는 지도력, 돌보는 지도력, 나누는 지도력이 살리는 지도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려야 할 책임을 맡은 기독 여성들 스스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들과 사회,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성적인 지도력을 여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녹아지고 포기해야 합니다. 재판장에서도 비기독교인들은 조정하기 쉬운데 기독교인들은 정말 조정못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가장 큰 장애물은 크리스천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 시애틀 지역의 여성들이 연합해서 함께 기도하고 여성들의 지도력을 위한 모임을 갖는것에서 큰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시작이 미흡하나 끝은 창대해질 것입니다. 이 불씨가 꺼지지 않고 전 교회가 하나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65년도에 기독여성선교대회에 말씀을 전하러 초청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수천명이 모인 여성집회 였는데 합심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분이 올라가시더니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파견한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를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뿌렸고 그 땅의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우리의 아들딸들이 피를 흘려서 자유를 지켰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나라는 기독교가 굉장히 약하니 우리가 교회 이름도 모르지만 전체가 합심해서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충격, 그때의 깨달음이 신학을 4년하면서 어떤 교수에 의한 깨달음보다 더 크게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다는 것은 기도가 합해질 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온 지구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기적같은 역사를 펼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여성들도 모여서 기도하면 북한 땅도 아프리카 땅도, 변화될 줄 믿습니다. 한 마음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기도해서 하나 되는 역사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전 세계에 뜨거운 성령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계속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여성의 특권이 있습니다. 또한 무한한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시켜 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억만가지 일 중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많이 닮은 일입니다. 모성을 지닌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이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잠재력을 여성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향해 기대를 가지고 계시며 거룩한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오늘날 여성은 그 역할을 감당해주어야만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도 폭력에 시달리고 힘의 세력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불행한 비극을 맞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를 살면서 특별히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도력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지도자들로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여러분 소원이고 제 소원인 줄 믿습니다.
어느 치열한 전쟁에서 병사들은 잠시 휴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장교가 자신은 피가 흐르기 때문에 매우 심한 갈증이 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를 본 위생병이 정말 최후의 순간을 위해 준비한 비상용 수통을 가지고 와서 부상입은 장교에게 주었습니다. 이 장교가 이 수통을 받아 마시려고 하는 순간 그곳에 있는 군인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부대원 전체가 똑같이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교는 먼저 소대장에게 수통을 건냈습니다. 소대장이 물통을 받고 잠깐 생각하다가 물통에 입을 대고 마시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통을 장교에게 주었습니다. 장교가 반갑게 물을 받아든 순간 소대장이 전혀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장교도 물 마시는 시늉을 하고 옆에 있는 병사에게 넘겼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이 수통을 받았지만 물을 마시진 않았는데 신기하게 한명도 목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붉은 물을 주사에 넣어서 감자에 주입하면 감자 전체가 붉게 된다. 리더가 취하는 행동은 마치 물감처럼 그들과 함께 있는 조직원에게 스며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크리스천들은 나만 살고 나만 새생명 얻어서 천국에 들림받기 위해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나눔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살려나갈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요, 하늘 나라의 대사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칭해주시면서 우리의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 뿐 아니라 온 새상에 일어나느 불행한 일의 자취를 보면서 한 지도자의 능력과 지도력이 인류의 생존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과 감격, 소망을 줄 수 있는 건강하고 바른 지도력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지도력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때까지 지도력을 오해해왔습니다. 힘이나 지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강한 힘이나 권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자기 뜻을 펼치며 사람들을 자리나 위치로 끌고갈 수 있는 사람을 지도자 혹은 지도력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20세기 동안 그런 역사가 이어져왔고 이 사회는 힘에 의존하고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위에 의존하는 이런 지도력,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힘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상대자를 꺾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기뿐 아니라 조직 전체를 망가뜨리는 역사를 수없이 보아왔다.
힘의 지도력은 함께 묶어주신 이웃과 내가 섬겨야 할 사회를 내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저들보다 내가 더 강해지고 내가 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는 자리에 올라갈까를 고심하게 됩니다.
지도력을 통해 도움이 되기 보다는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파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지도력에은 살리는 지도력이 있고 죽이는 지도력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지배해온 지도력은 무너뜨리는 지도력이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필요한 지도력은 보살피고 품고 세워주는 모성적인 리더쉽이며 힘에 의존했던 남성적인 지도력이 아니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여성 지도력만이 21세기 이후에 세상을 살려낼 수 있고 유지시킬 수 있는 지도력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도력은 영향력입니다. 처음 소개한 이야기에서 장교가 자기도 목이 마르지만 다른 자기의 부하들을 생각하면서 물 마시는 시늉만했지 마시지 않았던 희생과 사랑의 지도력이 부대 전체가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모두가 목이 마르지 않는 결과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 지도력이 영향력입니다. 나도 저렇게 되야지,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바로 영향력은 여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존경하게 될 때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될 때 리더의 위치가 바로 서게 되고 주변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곳에서 참된 지도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말하는 영향력, 지도력은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지도력이 형성됐습니다. 너보다는 내가 한단계 올라가면서 지도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향력이 지도력이 되는 이 시대에는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지도력이 형성됩니다. 지도력은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모든 활동이 지도력이 됩니다. 지도력은 한 사람의 행동이나 가치관, 생활과 삶에 변화를 끼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여러분과 나를 새롭게 만듭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내 가치관이 변해지고 질서가 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출세를 할까를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이제는 내 위에 네가 오고 하나님이 오는 질서가 달라지는 변화를 가져올까를 고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의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항 지도력, 가장 강한 영향력을 인류 역사에 우리에게 끼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제자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지도력은 기능이나 학위가 아닙니다. 그런것은 도움은 되지만 지도력은 절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지도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개인에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그룹의 조직에 영향력을 끼치는 모든 과정을 기독교적 지도력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은 영향력을 끼치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도력이라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하나님을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그 노력 전체를 지도력이라고 한다.
가장 위대한 지도력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복음서를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위대한 지도력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평양에 갔더니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라고 적혀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라고 사람 이름이 수없이 써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치고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표현하시기를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표현하는 지도력은 종입니다. 이 세상의 지도력과 성서의 지도력은 얼마나 정반대인지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하고 싶으면 섬겨라.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고 말했습니다. 머리가 내리는 모든 지시는 몸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야 할 참다운 몸, 참된 지도력의 모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하와를 아담의 돕는 베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있고 사람이 다스리는 물질이 있는 것이 창조의 처음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위에 서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인간의 모든 범죄의 시작입니다. 교만과 욕심이 인간의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다스린다는 단어가 보살피고 보호하는 관계에서 지배하는 의미로 바뀐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판단력과 분별력이 달라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회학자들은 여성지도자들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내 삶의 영향력이 이웃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내 안에 타는 성령의 불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절망의 세상 가운데 하늘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영향력은 교만으로 인해서는 드러나지않습니다.
21세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사탄이 가장 즐겨쓰는 장애물은 인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해서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인의 본질입니다. 죽으면 천국 갈 수 있게 해주는 길, 세상에서 힘들 때 위로해주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행해야 하는 지도력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모르는 진리, 알지 못하는 것을 내 삶을 통해서 저들에게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깨소금의 고소함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직접 먹어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지도력은 말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한 영량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은 본받고 책임과 역할은 경시하고 방치하고 혹시 우리가 거꾸로 사는 21세기 크리스천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는 고백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표현보다 더 큰 뜻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제자고 예수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걸음걸음은 예수를 닮아가는 걸음입니다. 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바로 예수 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힘있는 지도력은 가장 예수 닮은 자, 가장 스승께 기쁨이 되는것은 가장 스승을 많이 닮은 제자인 것입니다.
제 동생이 피아니스트입니다. 제자들이 많습니다. 대학입시 때 커튼을 쳐놓고 시험을 봅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연주를 시작하면 누구 제자인지 바로 안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를 보고 스승이 누구인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옷 입는 것, 웃는 모습 하나를 보면서 예수를 닮았구나, 크리스천이라고 까지 안해주면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을 수는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지도력, 예수를 스승으로 모신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이런 삶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성 지도력의 중요성과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와는 돕는 자입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현숙이라는 단어은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능력을 발휘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칭찬받고 자녀에게 칭송받고 성 밖에서까지 칭송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것이 학력이건, 성격이건, 시간이건 무엇이든지, 나에게 주신 것을 보다 더 활발하게 개발하고 발휘해서 내 몫을 다하는 여성, 다 없어지지만 이 현숙한 여인,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서, 잠언서 3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이 바로 여성의 지도력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거니와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 손으로 집을 허문다고 했습니다. 집이라는 것은 가문, 가풍, 자녀를 이야기합니다. 누가 가정을 세웁니까. 여인이 세웁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관계도 세우고, 관계도 세우고 자녀도 세우며 무너진 경제도 세웁니다. 한 가정의 수준은 아내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자녀의 수준은 어머니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한 국가의 수준은 여성들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의 삶의 질, 여성의 가치관, 여성의 삶의 태도, 여성의 삶의 모습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온 인류의 반 이상이 여성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훨씬 더 많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여성들의 자질과 여성들의 지도력을 무시하고 방치하는 것은 사회 조직과 국가의 가능성을 절반으로 깎는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후 쯤에는 세계적인 기업의 CEO가 여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급변하는 기계 문화 속에서 황금 만능주의, 이런 가치관에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너무 분주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들은 모두 지쳤습니다. 고단하고 상처입고 병들어 입습니다. 감성이 병들고 모르는 사이에 영성이 다 죽어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 무엇인가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닮은 품성, 품을 수 있고 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지도력, 보살피는 지도력, 돌보는 지도력, 나누는 지도력이 살리는 지도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려야 할 책임을 맡은 기독 여성들 스스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들과 사회,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성적인 지도력을 여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녹아지고 포기해야 합니다. 재판장에서도 비기독교인들은 조정하기 쉬운데 기독교인들은 정말 조정못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가장 큰 장애물은 크리스천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 시애틀 지역의 여성들이 연합해서 함께 기도하고 여성들의 지도력을 위한 모임을 갖는것에서 큰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시작이 미흡하나 끝은 창대해질 것입니다. 이 불씨가 꺼지지 않고 전 교회가 하나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65년도에 기독여성선교대회에 말씀을 전하러 초청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수천명이 모인 여성집회 였는데 합심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분이 올라가시더니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파견한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를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뿌렸고 그 땅의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우리의 아들딸들이 피를 흘려서 자유를 지켰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나라는 기독교가 굉장히 약하니 우리가 교회 이름도 모르지만 전체가 합심해서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충격, 그때의 깨달음이 신학을 4년하면서 어떤 교수에 의한 깨달음보다 더 크게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다는 것은 기도가 합해질 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온 지구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기적같은 역사를 펼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여성들도 모여서 기도하면 북한 땅도 아프리카 땅도, 변화될 줄 믿습니다. 한 마음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기도해서 하나 되는 역사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전 세계에 뜨거운 성령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계속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책임입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