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임마누엘교회 송찬우 목사
날짜 : 2009년 5월 31일
성경본문 : 디모데후서 1:15-18
제목 : 다른 사람을 격려해주는 삶을 살아가기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인격,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사람은 함께 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남자의 갈빗대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주위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쳐지나가는 것조차, 이름 듣는 것 조차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면 반갑고 또 만나고 싶고 생각만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일까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힘과 용기와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라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낙심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저렇게 해주길 바라고 내 인격과 내 말, 내 마음을 전적으로 믿어주길 바랍니다. 또 나에 대해서 이해해주고 참아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을 불신하고 말 한마디 조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인간 관계는 크게 두가지가 가능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버리는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를 힘들게 하는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15절에 보면, 부정적인 사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름을 밝혔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 이것은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와 뜻을 달리했다는 얘기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고자 하는 일, 그 일을 같이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그 뜻에 동의해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협력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와 뜻을 달리했다고 바울 사도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몹시 피곤하고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6-18절 말씀에 또 다른 인간관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격려해주는 인간관계였습니다. 유쾌하게 해주는 인간관계였습니다. 격려와 유쾌하게 해주었다는 말은 Refresh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을 내게 해주었다, 용기를 북돋워주었다는 말입니다. 오네시보로의 인간관계가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만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자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고 순교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그 때의 형편이 달랐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말 못할 잘못을 저질러서 감옥에 있지, 왜 무죄한 사람이 감옥에 있겠느냐고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네시보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만은 바울 사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무 잘못도 없다. 이 바울 사도의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갇혀있고 바울 사도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의 의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형수가 감옥에 갇혀서 사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심지어 가족도 면회 사절하였습니다. 목사도, 신부도, 절에서 온 사람도 안 만나주는데 한 여자 집사님만을 만나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자 집사님을 만나주었을까요? 그 여자 집사님은 이 사형수를 만났을 때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형수가 처음에는 안 만나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하는 수 없이 사형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재판받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다른 공범들도 있었는데 당신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죄는 다 내게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이끌려서 할 수 없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다 놓아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당신은 원래 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 몇 줄의 글이 사형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완악한 마음을 열게 했습니다. 진실을 알아주는 것처럼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비록 실수는 했지만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해주는 한 마디 말이 큰 것입니다. 이 사형수는 집사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예수를 믿고 사형장에 가기까지 전도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음의 밭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해서 상처를 입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소리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울 사도를 보고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어떻게 감옥에 갈 수 있나, 그는 죄인이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자주 드나들면서 바울 사도를 위로합니다. 바울 사도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위로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위로했습니다.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감옥은 오늘과 형편이 다릅니다. 자주 가서 바울 사도가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뭔가 바라고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대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진실과 거룩한 희생에 함께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네시보로가 자기를 봉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봉사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었습니다. 섬김은 기쁨과 함께 이루어질 때만 상대방에게 격려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천만금을 준다 해도 기쁨과 격려와 함께 가지 않으면 짐이 되고 부담이 됩니다. 더군다나 불평과 원망이 더해진다면 상대방을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상처로 남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흰 머리와 주름살을 상대방에게 떠넘깁니다. 당신 때문에 흰 머리가 늘었다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책임을 넘길 때가 있습니다. 또는 자녀들에게 넘깁니다. 다 때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가 흰 머리가 다른 사람보다 많다는 것은 유전인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수고가 의미있게 다가오려면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 행복으로 다가올 줄 믿습니다.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다같이 행복할 수 있습ㄴ디ㅏ.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수고하는 자체보다 수고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고기국을 끓여도 마음 자세가 옳지 못하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온전해져야 합니다. 기쁨과 감사로 할 수 없다면 안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수성찬을 마련해놓고서라도 우리가 마음 불편한 사람과 먹어보세요.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길 때에, 봉사할 때에 상대방에게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의무적으로 부득이하게 하는 거을 알게 되면 그 인간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단 돈 1달러를 주어도 기쁨으로 주면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부족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줄 때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로를 내가 받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격려해주고 유쾌하게 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했으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도 이것을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생각할 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 자매들을 잘 섬겨주고 즐겁게 해주므로 용기주어 함께 주 안에서 세워져야 함을 믿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의 나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나입니까. 격려하는 나입니까. 실망을 주는 나입니까. 여러분, 한번쯤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을 짚어봐야 할 줄 믿습니다.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큰 일을 하지 못해도 늘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옆의 사람에게 힘이 되는 말 마음을 유쾌하게 해 줄 수 있는 말 한마디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일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 나눔의 달, 구호를 함께 외치며 한달을 보냈습니다. 서로를 유쾌하게 해주는 복된 은혜의 삶을 계속 열어나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 2009년 5월 31일
성경본문 : 디모데후서 1:15-18
제목 : 다른 사람을 격려해주는 삶을 살아가기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인격,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사람은 함께 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남자의 갈빗대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주위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쳐지나가는 것조차, 이름 듣는 것 조차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면 반갑고 또 만나고 싶고 생각만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일까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힘과 용기와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라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낙심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저렇게 해주길 바라고 내 인격과 내 말, 내 마음을 전적으로 믿어주길 바랍니다. 또 나에 대해서 이해해주고 참아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을 불신하고 말 한마디 조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인간 관계는 크게 두가지가 가능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버리는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를 힘들게 하는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15절에 보면, 부정적인 사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름을 밝혔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 이것은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와 뜻을 달리했다는 얘기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고자 하는 일, 그 일을 같이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그 뜻에 동의해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협력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와 뜻을 달리했다고 바울 사도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몹시 피곤하고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6-18절 말씀에 또 다른 인간관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격려해주는 인간관계였습니다. 유쾌하게 해주는 인간관계였습니다. 격려와 유쾌하게 해주었다는 말은 Refresh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을 내게 해주었다, 용기를 북돋워주었다는 말입니다. 오네시보로의 인간관계가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만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자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고 순교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그 때의 형편이 달랐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말 못할 잘못을 저질러서 감옥에 있지, 왜 무죄한 사람이 감옥에 있겠느냐고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네시보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만은 바울 사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무 잘못도 없다. 이 바울 사도의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갇혀있고 바울 사도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의 의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형수가 감옥에 갇혀서 사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심지어 가족도 면회 사절하였습니다. 목사도, 신부도, 절에서 온 사람도 안 만나주는데 한 여자 집사님만을 만나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자 집사님을 만나주었을까요? 그 여자 집사님은 이 사형수를 만났을 때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형수가 처음에는 안 만나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하는 수 없이 사형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재판받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다른 공범들도 있었는데 당신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죄는 다 내게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이끌려서 할 수 없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다 놓아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당신은 원래 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 몇 줄의 글이 사형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완악한 마음을 열게 했습니다. 진실을 알아주는 것처럼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비록 실수는 했지만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해주는 한 마디 말이 큰 것입니다. 이 사형수는 집사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예수를 믿고 사형장에 가기까지 전도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음의 밭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해서 상처를 입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소리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울 사도를 보고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어떻게 감옥에 갈 수 있나, 그는 죄인이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자주 드나들면서 바울 사도를 위로합니다. 바울 사도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위로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위로했습니다.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감옥은 오늘과 형편이 다릅니다. 자주 가서 바울 사도가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뭔가 바라고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대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진실과 거룩한 희생에 함께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네시보로가 자기를 봉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봉사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었습니다. 섬김은 기쁨과 함께 이루어질 때만 상대방에게 격려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천만금을 준다 해도 기쁨과 격려와 함께 가지 않으면 짐이 되고 부담이 됩니다. 더군다나 불평과 원망이 더해진다면 상대방을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상처로 남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흰 머리와 주름살을 상대방에게 떠넘깁니다. 당신 때문에 흰 머리가 늘었다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책임을 넘길 때가 있습니다. 또는 자녀들에게 넘깁니다. 다 때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가 흰 머리가 다른 사람보다 많다는 것은 유전인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수고가 의미있게 다가오려면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 행복으로 다가올 줄 믿습니다.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다같이 행복할 수 있습ㄴ디ㅏ.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수고하는 자체보다 수고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고기국을 끓여도 마음 자세가 옳지 못하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온전해져야 합니다. 기쁨과 감사로 할 수 없다면 안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수성찬을 마련해놓고서라도 우리가 마음 불편한 사람과 먹어보세요.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길 때에, 봉사할 때에 상대방에게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의무적으로 부득이하게 하는 거을 알게 되면 그 인간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단 돈 1달러를 주어도 기쁨으로 주면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부족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줄 때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로를 내가 받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격려해주고 유쾌하게 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했으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도 이것을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생각할 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 자매들을 잘 섬겨주고 즐겁게 해주므로 용기주어 함께 주 안에서 세워져야 함을 믿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의 나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나입니까. 격려하는 나입니까. 실망을 주는 나입니까. 여러분, 한번쯤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을 짚어봐야 할 줄 믿습니다.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큰 일을 하지 못해도 늘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옆의 사람에게 힘이 되는 말 마음을 유쾌하게 해 줄 수 있는 말 한마디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일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 나눔의 달, 구호를 함께 외치며 한달을 보냈습니다. 서로를 유쾌하게 해주는 복된 은혜의 삶을 계속 열어나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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