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미동부지역 최초의 한인교회로 세워진 뉴욕한인교회(담임 장철우 목사)가 창립 88주년을 맞아 4월 5일 오후 2시 30분 음악회를 개최했다.

음악회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은주, 피아니스트 최승리, 황다운, 테너 최원회, 소프라노 홍혜란. 이한나, 메조소프라노 박영경, 바리톤 이정민, 오르가니스트 박예은 씨와 뉴욕한인교회 성가대와 백혜선 지휘자(뉴욕한인교회 음악 디렉터)가 섬겼다.

이 날 음악회는 오르간 전주 바흐 '환상곡과 푸가(Fantasia and fugue in g minor, BWV 542 - J.S Bach), 오페라 모음곡 모차르트의 '휘가로의 결혼' 중 '모든 게 다 준비되었다(Aprite un po' quegl'occhi from Le Nozze di Figaro, W.A Mozart), 벨리니의 '청교도' 중 '당신의 상냥한 목소리가'(Qui la voce sua soave mi chiamava from I Puritani, V. Bellini) 등과 야나첵(L. Janacek)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보리밭', '남촌' 등 한국가곡, '영광과 능력을 주님께 돌리다(No 10 Give unto the Lord your glory & strength)' 등 합창으로 진행됐다.

이번 음악회는 뉴욕한인교회 내의 맨해튼 음대, 매네스 음대, 줄리어드 음대 등 유수의 음악 대학을 재학하거나 졸업한 실력 있는 음악 전공자들이 준비한 첫 음악회다. 뉴욕한인교회는 앞으로 지역 사회 선교를 위해 이와 같은 음악회를 일 년에 두 차례 기획해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지역 사회 음악인들이 참여하는 음악회도 계획하고 있다.

뉴욕한인교회는 이 음악회를 시작으로 세계를 이끌어 가는 훌륭한 음악가 배출을 위해 후학 양성 지원 프로그램으로 장학금을 수여한다고 밝히고 이 날 이정민 군과 최승리 양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새벽기도에서 피아노 앙상블이 연주될 정도로 뛰어난 음악인들이 많이 모이는 뉴욕한인교회는 지난 88년 동안 안익태 씨를 비롯해 성악가 김자경, 이규도, 박인수, 윤현주, 김성길, 피아니스트 김대진, 이대우, 이남수,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씨 등 한국에서 이름을 떨치는 음악인들이 연주를 하기도 한 교회이기도 하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36년 10월호 [The Korean Student Bulletin]에 악보 광고가 나와 있으며 1942년 작곡 발표회가 개최됐다. 현재 뉴욕한인교회에는 그가 애국가를 작곡하던 피아노가 보관되어 있다.

전문 음악인이 모이는 교회 외에도 뉴욕한인교회는 1920-30년대 조선 독립 운동 및 한인 모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후일 한국에 돌아가 지도적 인물들이 된 조병옥, 김활란, 박마리아, 박은혜, 박인덕, 장리욱 등이 교회에 출석했으며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몇 차례 방문한 교회이기도 하다. 1960-70년대는 김이곤, 김득중, 서중석, 김홍기, 한완상, 한호석, 한성수 등 한국의 신학자들이 성경 공부를 인도하기도 한 장소였다.

한편 뉴욕한인회도 1960년 뉴욕한인교회에서 시작됐다. 교회 성도들이 한인회의 중심 업무를 맡았으며 교회는 학생회, 국민회, 동지회 등과 봉사단체들의 각종 집회와 임시 거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한인들의 대규모 이민과 더불어 커뮤니티 형성기를 맞아 뉴욕한인봉사센터와 가정문제연구소가 이곳에서 출범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 전후를 기해 최초의 한글 타자기가 제작된 장소로도 유명하다. 교인 이원익, 송기주, 김준성 목사 등이 여러 해에 걸쳐 여러 형태의 한글 타자기들을 개발되고 제작했다.

교회 창립은 1921년 3월 1일 뉴욕 타운 홀에서 열린 삼일절 제3주년 기념 대회 직후 조선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킴버랜드 여사(Mrs. Angie Graham Kimberland)의 제안으로 논의됐다. 그해 4월 18일 매디슨애비뉴감리교회"(Madison Avenue Episcopal Methodist Church: Madison Ave. & 23rd St.) 삭크만 목사의 주선으로 매디슨애비뉴감리교회에서 임종순 목사의 인도로 40여명의 유학생들이 첫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 1923년 4월 15일 미국감리교 본부의 지원과 교인들의 헌금으로 교회 건물(459 W. 21 Street)을 구입해 1923년 4월 22일 첫 입당 예배를 드리며 교회 이름도 현재의 'Korean Church & Institute'라고 지었다. 이름처럼 뉴욕한인교회는 당시 신앙 공동체였을 뿐만 아니라 100여명 한인 교포들의 사회 기관의 구실을 했다.

교회는 1920년대의 인종차별과 30년대의 대공황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위해 작은 4층 건물 3, 4층에 20여 명의 교인들, 주로 학생들의 합숙소로 두고 그들의 삶의 문제를 도왔다. 현재도 인근에 해외 유학생들의 기숙사로 유명한 인터내셔널 하우스가 있다.

이후 1927년 다시 교회를 현재 컬럼비아대학교 건너편 골목(633 W. 115th St. New York, NY 10025)으로 이전했다. 창립 당시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100명 중 60명이 학생이라 교회 내 유학생들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교회를 대학 건너편을 이전한 이후에는 더욱 한인 유학생 중심으로 교인들이 구성됐다.

또한 1985년에는 뉴욕 지역에서 최초로 영어 회중(ELM: English Language Ministry)이 설립돼 한국어 회중(Korean Language Ministry: KLM)과 대등한 파트너가 될 만큼 성장, 재정과 행정에서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재단 이사, 건물 유지, 교육 등 공공의 관심사에는 함께 손잡고 힘을 모으고 있다.

그러다 제11대 담임 (1975-1988년)이었던 최효섭 목사 재임 시에는 이민법의 도움으로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들어와 처음으로 주일 예배 출석 인원이 400여 명을 넘어섰다. 그래서 예배 공간 확보를 위해 세인트힐다학교(St. Hilda School) 채플을 빌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으며 최효섭 목사는 사임했다. 이어 12대 담임 차원태 목사(1988-2000) 재임 시에는 신령직 임원(장로, 권사, 집사 등)을 교회 내 계급이란 이유로 폐지하는 큰 고비를 넘기도 했다.

제1대 담임 임종순 목사(1922-1923년) 이래, 김영섭 목사, 윤병구 목사, 임창령 목사, 김준성 목사, 배민수 목사, 윤은팔 목사, 임순만 목사, 정달빈 목사, 김병서 목사, 최효섭 목사, 차원태 목사, 이근애 목사, 한성수 목사가 사역한 바 있으며 현재 장철우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반석 위의 교회'라는 표어로 2009년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자(에베소서 2:20-22, 에스라 3:10-13)'를 목표로 삼고 있는 뉴욕한인교회는 오는 12일 오전 6시 맨하탄 지역 9개 한인 교회의 연합 부활절 예배 장소이자, 같은 날 필라델피아에서 시작하는 서재필 독립기념 마라톤의 종착지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