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 2년 동안 다섯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화물 트럭을 몰고 지방 장터를 찾아다니며 양은 그릇도 팔아 보고 골목 시장에서 리어카 행상도 해봤다. 집사 직분도 받고 남전도회 회장 일도 맡아서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기만 했다.

딸 윤진이는 1학년이고, 아들 한수는 7세가 되었다. 아내는 윤진이를 학교에 보낸 뒤에는 연탄 값이라도 벌겠다고 시험지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방 끈도 짧고 특별한 기술도 없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내는 실의에 빠져 있는 나를 위로하며 "여보, 힘내세요.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기도하고 때를 기다려 봐요. 곧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다. 아내의 말이 이토록 힘이 된 적이 없었다. 시집와서 그때까지 외식 한 번 못해 보고 아이들 키우면서 어렵게 살아왔어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참고 살아온 아내가 고맙기만 했다.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던, 하나님, 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종의 기도를 외면치 말고 신속하게 응답해 주옵소서. 좋은 일자리를 허락해 주옵소서. 사글세도 내야 하고 이자도 물어야 하고 교육비와 생활비도 필요합니다. 주님, 아시지요. 주님, 도와주세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다.

몇 주가 지난 뒤 교회에서 최 집사님을 만났다. 우리 형편을 잘 아는 집사님은 머뭇머뭇 하면서 행여 미국에 갈 생각은 없는지, 원한다면 한 번 알아봐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집사님의 남편은 미국에 간 지 3년이 넘었는데 다달이 꼬박꼬박 돈을 보내 주고 그게 한국에서 버는 돈의 세 배 정도는 되니 고생은 되겠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집사님의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도무지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불확실한 장래와 생활 자체도 문제지만 커 가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다. 나나 아내는 배우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 있었다. 부모를 원망도 해보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고 어찌하든 아들, 딸은 대학교에는 꼭 보내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수속비며 커미션까지 500만 원이나 든다는데 '내 형편에 어떻게'하고 고개를 저어 보지만, 세 배 정도는 더 벌 수가 있다는 집사님의 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오! 하나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의 뜻이라면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해주옵소서.'

형편은 여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5년만 고생하자. 열심히 저축하면 5년 후에는 개인 택시 한대는 살 수 있을거야. 그러면 아이들 교육 문제도 생활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내 마음은 자꾸만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내에게 최 집사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 생각을 털어 놓았다. 아내는 돈도 돈이지만 당신은 몸도 약한데, 또 당신이 없으면 아이들과 자신은 어떻게 사느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면서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만성 류마티스성 관절염을 앓았다. 6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서 지냈고, 다행히도 어머니의 지극한 간병으로 회복되었지만 겨울철만 되면 손마디가 붓고 통증이 오곤 했다. 또 위장이 좋지 않아 자주 체해서 아내는 늘 걱정을 하곤 했다. 나는 그래도 한 주만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인지 우리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항상 기도해 주시는 한 권사님이 돈을 융통해 줄 테니 수속을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라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순간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고 계심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우리 윤진이, 한수가 아빠 없이 어떻게 지낼까? 마음 여린 아내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

수속은 빠르게 진행되어 여권이 나오고 드디어 비자가 나왔다. 떠나기 하루 전날 우리 가족은 저녁상을 물린 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찬송을 부를 수 없었다. 아내도 울고 나도 울고 아이들도 따라서 울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고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오, 주님, 우리 윤진이, 한수, 사랑하는 아내, 내가 없는 동안 항상 지켜 보호해 주세요. 사는데 힘들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 잘 섬기게 해주세요. 또 우리 윤진이, 한수,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주세요. 이 부족한 종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과 같이 이제 가족과 친지와 고국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 미국으로 갑니다. 혈육도 없고 반겨 줄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떠납니다. 이 종과 동행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우들이 공항까지 나와서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셨다. 가족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보, 밥 잘 챙겨 드시고요. 항상 유의하세요. 여기 걱정일랑 말고요. 기도할게요."

"아빠, 힘내세요.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할게요."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북받치는 울음을 참고 아이들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끝까지 웃음으로 배웅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그래, 그 웃음 내가 끝까지 지켜주리라' 다짐하면서 개찰구를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