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급히 열한 제자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열한 제자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이전의 그들의 사연도 모르고, 장차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신 뒤로 그들이 어떻게 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결코 두드러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은 내세울 만한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을 얻으신 주님이 이런 평범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온전한 계시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과연 주님 다우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낮은 심령들에게 여전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면 그분은 부활하셔서도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이 두 나그네의 마음 상태를 살펴봅니다. 먼저 이 두 나그네는 희망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희망이 해처럼 환히 타오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기적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동안,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희망은 날이 갈수록 더 밝아졌습니다. 십자가 자체도 그들의 희망을 무산시키지 못했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흘째의 태양이 거의 지고 있었고, 곧 어둠이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일몰보다 더 무겁고 막막한 어둠이 그들의 심령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몇이 급히 와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기별을 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는 것과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날 저녁 엠마오로 가던 그들은 주님을 잃었다고 확신했고, 그분을 잃었으니 당연히 희망도 잃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가운데 이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을 잃지는 않았습니까? 한때는 그리스도를 아주 생생히 느꼈지만 지금은 살았다고 하는 이름뿐 죽은 자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다음으로, 이 두 나그네는 기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실 때에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그들의 마음에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분이 함께하실 때 그들의 모든 근심 걱정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그들의 지식 바깥으로 사라지시자 그들은 마치 햇빛을 잃은 것 같았고, 그래서 그들은 길을 가면서 슬퍼했습니다.

슬픔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이 낯선 인파 속에서 느끼는 슬픔이 있고, 이미 영영 사라져 버린 과거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느끼는 노인의 슬픔도 있습니다. 이러한 슬픔은 유한한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다른 영적 슬픔이 있는데, 그 원인은 주님의 부재입니다. 기도해도 천국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이 달갑지 않을 때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시므로 그분께 둔 모든 희망이 조롱거리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영적 피폐함으로 힘들어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면 자신의 마음상태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밖에 주목 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주님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잃었고, 기쁨을 잃었지만 주님을 향한 갈망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날 오후, 그들의 대화는 온통 주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는 활기와 격정과 열의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잃고 나서야 주님을 향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깨달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깊은 갈망을 깨닫게 했습니다. 기도 없는 삶, 뒷걸음치는 삶 속에서 그분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비로서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두 제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조지 모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