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
이장렬 교수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를 졸업하고 서든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신약학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Ph.D.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Christological Rereading of the Shema in Mark's Gospel>, <바디매오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예수님의 연약함과 주(主)되심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22:1-13

1. 유월절이라고도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습니다.

2.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3. 사탄이 그 열 둘 중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4.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5. 그들은 기뻐하면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6. 유다도 이에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7. 유월절 양을 희생제물로 잡는 무교절이 됐습니다.

8.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우리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

9. 그들이 물었습니다. "저희가 어디에서 준비하면 좋겠습니까?"

10.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저자 주① )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

11. 그 집주인에게 '선생님께서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냐고 물으셨습니다'라고 말하라.

12. 그러면 그가 잘 정돈된 큰 다락방(저자 주② )을 보여 줄 것이다. 그곳에서 준비하라."

13.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저자 해설 및 묵상>

 

누가복음 22:1-6을 시작으로 22-23장에 걸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기사를 보면, 예수님이 1세기 유대교의 종교권력자와 자신을 배신한 한 제자의 공모에 의해 안타깝게 희생된 것으로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주(主)님 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명(22:8)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식사를 어느 곳에 준비해야 할지 예수님께 여쭙니다(9절).

유월절을 맞아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상황에서 유월절 식사 장소를 마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생각할 때 베드로와 요한의 질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이미 다 준비해 놓으셨다는 듯) 누구를 좇아가고 어떻게 말을 하고 어디서 유월절 준비해야 할지 등 세부사항을 즉각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13절 [19:32 함께 참조]).

유월절 식사에 관한 이 모든 일들이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뤄진 사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암시합니다. 그는 단순히 종교 권력자들과 한 제자의 공모를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정치적으로 희생당한 예언자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연약함의 자리로, 낮은 자리로, 고난을 감내하는 자리로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한 자리 가운데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어려움을 겪는 제자들은 결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만유의 주재되시는 주님의 길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체포되어 심문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적잖은 수의 유대인들은 그가 너무나 무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연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력함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미련함'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움을 알지 못했습니다(고전1:25).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십자가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통해 승리하셨고, 자신의 버려짐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 때때로 예수님이 연약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인간들이 원하는 그대로 돌아가는 것 같고, 맘몬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지는 가운데 주님은 정작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그냥 끌려가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자 주③)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분"(히13:8)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 그가 말씀한 일들은 그대로 역사의 한복판에서 성취됩니다(사55:11 참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함과 고난의 자리에서 그리고 심지어 주님이 '연약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라도 그분의 말씀 따라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에는 역설적인 면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연약함(십자가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이 우리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고난의 자리로 이끄실 때도 그저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내실 것입니다(고전12:10).

<한 줄 기도>

 

삶이 요동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변함없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신뢰하게 하소서


편집자 주)
본 묵상 내용은 이장렬,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40일간의 묵상』(요단출판사, 2019)에서 발췌하여 개정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요단출판사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사용합니다. 이 책에 대한 추가 정보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mall.godpeople.com/?G=9788935017379

 

 


 

저자 주①)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주로 여자들이 물을 길거나 들고 다녔기에 남자가 물동이를 지고 가는 모습이 눈에 쉽게 띄었을 것이고,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남자)을 따라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 주②) 이런 '큰 다락방'이 있는 집이라면 1세기 유대 사회에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었을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저자 주③) 우리가 때로 이렇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강압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물론 주님은 여전히 역사의 주관자시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 하거나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