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02세를 맞은 김형석 교수가 "권력만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다수 의석을 가졌다고 뭐든지 힘으로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건 권력 사회이고, 군사 정권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 여당도 그렇다. 본질적으로 국민보다 정권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4일 게재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와 보수의 무조건적 대립과 갈등' 극복에 대해 "여당 사람들은 우리 편이 하는 건 선(善)이고, 야당이 하는 건 악(惡)이라고 본다. 똑같은 일도 우리가 하면 선이고, 상대방이 하면 악"이라며 "그러나 현실에서 0과 100은 존재하지 않는다. 40과 60 중 더 나은 걸 택할 뿐이다. 흑백 논리에 빠지면 이걸 못 본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1945-1947년 북한 평양에서 살았다. 2년간 공산주의 치하를 직접 경험했다. 그건 흑백 논리의 사회였다. 거기에는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은 있어도, 미소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며 "1962년 방문한 동베를린에서 동독 사람들 얼굴에도 미소가 없더라. 흑백 논리의 사회는 분열은 있어도 화합은 없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도 흑백 논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선진국가를 보라. 흑백 논리의 좌우 대립은 없어졌다. 대신 진보와 보수가 함께 살게 됐다. 더 이상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어야 하는 세상이 아니게 됐다"며 "같이 살면서 누가 더 앞서느냐 경쟁하는 사회가 됐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좌만 남지, 우는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형석 교수는 "우리나라 진보 세력은 주로 운동권 출신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주사파 혹은 사회주의 혁명론에 젖줄을 댔던 사람들"이라며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라난 진보가 아니다. 그들의 사고는 아직도 냉전 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극복의 열쇠는 영어 문화권의 앵글로 색슨 사회에 있다. 그들은 600년 전부터 경험주의 사상을 가지고 살아왔다. 거기에는 흑백 논리가 없다. 선해도 비교적 선하고, 악해도 비교적 악하다. 실제 우리의 삶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라며 "현실에는 백도 없고 흑도 없다. 회색만 있다. 서로 더 나은 회색이 되기 위해 경쟁할 따름이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결법은 투쟁이 아니라 대화다. 의회민주주의는 대화를 기본으로 한다"고 전했다.
김형석 교수는 "환자가 있을 때 영국 사람은 약을 먼저 준다. 그래도 안 되면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한다. 이게 경험주의 사회의 정치관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사람은 토론을 통해 좀 더 빠른 걸 선택한다. 그래서 먼저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한다"며 "공산주의는 처음부터 수술을 한다.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가 '혁명'이다. 문재인 정부도 '촛불 혁명'을 내세운다. 그동안 많은 정책을 내놓았지만, 왜 현실에서 먹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수술을 자꾸 하면, 환자가 죽고 만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는 스스로 무너졌다. 19세기는 좌파와 우파 중 하나만 남으라는 절대주의 사회였지만, 20세기 중반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며 같이 가는 상대주의 사회가 됐다"며 "앞으로는 종교와 정치와 민족이 서로 달라도 여럿이 함께 사는, 다원주의 사회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