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게 안 지식이 오히려 근심을 사게 되어 일을 망치게 됨'이라는 뜻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식자우환(識字憂患)' 한자를 '識者憂患'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자(字)'를 '者'로 착각하는 이유는 덤벙대는 까닭도 있겠지만, 이 사자성어를 '어설픈 지식을 가진 자가 근심을 산다'고 하는, 어디서 들어서 고정된 관념 같은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자우환'의 배경은 이렇다. 유비(劉備)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책사로 제갈량(諸葛亮)을 얻기 전 유비에게 책사 노릇을 한 사람은 서서(徐庶)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위(衛)부인이었다. 위 부인은 어릴 때부터 글을 터득해 학식이 높고 글 또한 명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기개가 있는 여장부였다.
서서를 탐낸 조조(曹操)는 아들에게 보내는 위부인의 편지를 교묘하게 가로채 부인의 글씨체를 흉내내 '모친이 조조의 호의로 잘 있으니 위(魏)나라로 돌아오라'고 써서 보냈다. 효심이 많고 순진한 서서는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가 계시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아들을 본 위부인은 자초지종을 안 후 크게 개탄하며 '여자식자우환(女子識字憂患: 여자가 글자를 안다는 것부터가 화근을 사게 한 원인이 되었구나)'라는 글을 남기고 자결해 버렸다.
난데없이 글이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가리켜 필화(筆禍)라 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끄는 일을 필화사건(筆禍事件)이라고 한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 한탄조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글자에 재주가 있는 문장가라 할지라도 그 글이 문제를 일으켜 곤경에 몰리는 경우가 있다. 가령 조선 성종 때의 성리학자로서 문장에 뛰어난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필화사건이 그러한 사례라 할 것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풍자한 그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은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는 화근이 되었다. 김종직 문하로서 사관(史官) 일을 맡던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스승의 글을 실은 게 나중에 문제가 되어 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김일손은 사형에 처해졌다.
박근혜 정부 출범 때이든 문재인 정부 출범 때이든 총리나 장관 지명자들이 정식으로 일을 하려면 국회의 청문회(聽聞會)를 거쳐야 하는데, 언제고 말썽이 되는 게 후보들이 학위논문을 썼을 때 표절(剽竊) 의혹이나 혹은 신문·잡지 등에 과거 기고했던 글들이다. 이로 인해 청와대 인사 검증과정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느니 어쩌느니 시끄러운 논란을 벌였다.
장관 후보들은 본인들이 미래에 장관이 지명될 줄도 모르고 사려 깊지 못하게 글들을 써놓고는 그게 빌미가 되어 곤욕을 치르는 것이다. 이런 게 일종의 필화이고 식자우환의 일면이라 하겠다. 말로 화근을 일으키는 설화(舌禍)도 매한가지다.
▲김준수 목사의 저서 <바른 말의 품격> 한자편, 한글편(왼쪽부터). |
무식한 것도 탈이지만 글을 깨우치고 지식이 많아지는 것도 탈이 되는 것은 복잡한 인생살이에서는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도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도 했다.
필화든 설화든 설교자는 설교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 교인들과 대화할 때는 글이나 말 속에 화가 나 있거나, 성급하게 무얼 판단하거나, 특정인을 비방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훌륭한 목사들이 성질을 못 참고 툭 말을 내뱉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났으며, 교회가 두 동강 나고 목사 자신도 돌이킬 수 없는 환난에 처했던가!
비단 설교를 하는 목사뿐 아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말도 글도 조심해야 한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말과 글이 바르려면 평소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강퍅한 마음을 은혜로 부드러이 다스려야 하며, 사물을 바라볼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습성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휴대폰과 SNS는 편리하지만 때론 비수가 되어 교인들을 찌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휴대폰으로 문자를 날리거나 카톡으로 전할 말이 있을 때는 마음이 잔잔한 호수같이 평강을 유지할 때가 아니면 손도 대선 안 된다.
화가 나고 평정심을 잃을 때 휴대폰을 가까이에 두어서는 결국 일을 저지르게 된다. 한 번 날려버린 휴대폰 문자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아오지 않는다. 휴대폰을 가까이에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유다. '절대로 안 된다'는 필자의 충고를 목회자 여러분은 기억해두길 바란다.
비단 목사만 그럴까.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라서 교인들도 화가 나면 목사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쏟아내지 않는가? 그럼에도 더욱 조심하고 자제할 쪽은 목사다. 갈등과 오해를 촉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글인 경우에는 그 글을 보내기 전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한참 후에 또 기도하고, 다음날 또 기도해본 후에 보낼 일이다.
이렇게 간곡하게 호소하는 것은 필자가 이러한 실수를 몇 번 저질러 그게 통한이 되어서 하는 소리다. 목회자는 자신이 항상 부족하고 성령 충만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말과 글로 화를 입은 사례는 성경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한데, 잠언은 특히 말에 관한 교훈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성경구절은 18장 21절 말씀이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전도서 기자도 말을 삼가 조심할 것을 충고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전도서는 또한 지나치게 이상과 포부가 크면 허망한 것을 품게 되고 따라서 말도 많아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라"(전 5:7)는 말씀이 그것이다.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므로 괜스레 말만 많아봤자 대부분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도 전도서 기자는 환기시키고 있다.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전 10:14)
식자우환에 관해 단상에 잠기면서 사설(私說)을 늘어놓는 까닭은, 필자도 말에 대해 실수와 허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놈 말로 인해 얼마나 많이 일을 그르쳤고,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이들을 놓쳤으며, 얼마나 많이 은혜로운 판을 엎었는지! 쓰디쓴 쑥을 입에 머금고 끙끙 앓으며 신음했던 지나간 고초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기에 창피를 무릅쓰고 해보는 소리다.
김준수
중앙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정부기관과 대기업 등에서 일하다 50대 초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고, 풀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 <내 삶을 다시 바꾼 1%의 지혜>와 지난 10년간 집필해 온 신·구약 성경신학 7권 중 첫 권인 <모세오경: 구약신학의 저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