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정성수 교수
(Photo : ) ▲정성수 교수

자연을 바라보며 기원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과학자라 할지라도 어떤 특정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겠지만 해석이나 추론의 결과에 대해서는 극과 극의 대립이 발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우주, 생물, 인류의 기원에 대한 대답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과학을 자연에 숨겨진 사실 자체를 실험과 관찰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면 기원의 문제는 이미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 영역으로 과학은 기원에 대해 모른다고 답하는 것이 옳다. 반면 과학을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 설정 등 다양한 지적인 활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과학의 영역에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어느 가설이나 추론을 선택하는지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에 근거하기 보다는 그 사회가 우선시 하는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오늘날 진화론이 기원에 관하여 주류 과학인 것은 진화론이 사실로 증명되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진화론을 패러다임으로 우선 채택했기 때문이다. 창조론 역시 과학적으로 틀렸다고 증명된 적도 없고 사실이라고 증명된 적도 없지만 과거에 주류 패러다임에 속한 적이 있었다. 진화론을 받아들일지 창조론을 받아들일지는 결국 세계관과 믿음의 문제이다.

 

 

 

여기서 자연에 대한 과학적 해석이 과학자마다 다른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크리스천이라면 기원에 관한 성경해석도 달라도 되는 것일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늘 일'(요 3:12) 이라고 하신 것처럼 밝히 드러내지 않으신 부분은 분명 여러 해석 혹은 상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 내용인 창조, 타락, 하나님의 신적 개입,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등도 여러 해석이 가능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셨는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지식이나 생각대로 취사선택하여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진화, 창조가 과학논쟁의 화두인 것처럼 예수님 공생애 당시 이와 유사한 논쟁의 중심에 부활논쟁이 있었다. 구약성경 어디에도 부활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에 더더구나 부활이 없다하는 해석을 강하게 주장하는 무리가 있었다. 사두개인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반면 에녹이나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리어 올라간 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의 장면에서 부활을 희미하게나마 추측한 무리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음을 혼인관계의 예를 들며 예수님께 강력하게 도전하였다. 사두개인들이 사회적 상황을 가지고 부활이 없어야 합당한 것처럼 증거 한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성경에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므로 당시에 이렇게 해석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표적 창조과학 논쟁이 사두개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벌어진 것과 같다. 예수님은 부활을 어떻게 증거 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들도 익숙한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출 3:6, 마 22:32). 예수님이 이 구절을 언급하실 때 사두개인들은 이 구절이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떻게 부활과 연결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실 줄 몰랐던 것 같다. 보다 명확히 살펴보기 위하여 영어 성경을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다. 'I am the God of Abraham ~.' (나는 지금 현재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할 당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죽었다. 죽어서 이들의 존재가 사라졌다면 '나는 한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 (I was the God of Abraham ~.) 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출애굽 말씀을 인용해 해석하시면서 시제마저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셨다. 그렇기에 모세 당시에 이미 육신은 죽었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존재해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시제에서 그들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해석을 내리셨다. 이로써 사두개인에게 부활이 있음을 명확히 하셨다. 예수님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심으로 다른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셨다.

또 다른 예로 이혼 문제를 들고 나온 바리새인에게 결혼관계를 말씀하시면서 창세기를 인용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4-5)'. 본래(at the beginning)는 창조시의 태초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분명히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해석에는 다른 이견이 전혀 끼어들 수가 없게 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해석에는 모든 유신진화론이 부정된다.  예수님은 또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을 말씀하심으로 예수님도 요나의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분명히 인지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즉 예수님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을 실재하였던 사건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셨다. 비유니, 문학적 표현이니 하는 식의 해석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심판을 말씀하실 때에 노아의 때와 홍수사건을 문자적으로 언급하셨다. 노아의 홍수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던 사건이었음을 예수님은 거듭 밝히셨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천지창조 등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부분은 모두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셨다. 비유나, 상징, 신화로 해석하지 않으셨다.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셨다. 천지와  생물 그리고 인간 창조, 인간의 타락,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고 일어난 사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를 거듭 공증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내 생각대로 다른 해석을 하려고 할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하다. 우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마 22:29). 성경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이 부활과 인간창조와 노아의 홍수, 요나의 사건을 새로운 해석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문자적 해석으로 그것이 실재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또 세상과 타협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 역설적으로 과학자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세상학문이나 본인 생각에 잡혀서 아직도 창조신앙에 혼란스러운 분들이 계시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오해하였도다'로 끝났으면 좋겠다.

정성수 교수(충남대 의과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