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이 지나고 이제 본격적인 연말 시즌이 시작됐다.
필자의 병원도 추수감사절의 연휴를 쉬고 더욱 바쁜 12월을 맞이하면서 추수감사절에 쓸쓸하게 홀로, 아니면 가족 둘만이 연휴를 보내신 노인분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 연휴를 보내며 환자로부터 온 편지가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어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의 남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기는 죽어도 병원엔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제가 남편을 병원에 입원시키면 저를 죽이고 자신도 베란다에서 뛰어 내려 죽겠다고 합니다. 남편은 힘이 넘쳐서 제 고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사를 하다보면, 가끔 환자들이나 보호자들로부터 비밀 편지를 받게 된다. 초기 치매환자는 의심이 많아지고 뇌의 전두엽 문제로 인하여 참을성이 없어지고, 화를 잘 내며 성격이 괴팍해지는 것을 보게된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보호자는 진료시간에 환자가 화를 낼까봐 그 문제를 언급할 수가 없고, 의심이 많아진 환자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보호자가 의사와 단독 상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환자의 보호자로부터 비밀편지를 가끔 받게 된다.
위의 글을 보내온 환자 부부는 70대 후반으로 자녀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고 남편과 단둘이만 미국에 살고 있다. 수십년 간의 미국 이민생활 중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건만, 이제는 남편의 정신과 감정이 돌아오는 약간의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이 남보다 더 무서운 공포, 또는 서러움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문제가 LA의 많은 노인층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노인 부부들은 대부분 둘이서 살고 있으며, 자녀들이 있다 하더라도 타지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아, 치매환자, 또는 그의 보호자가 도움을 받을 곳이 한정되어 있다.
필자는 치매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매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내과 전문의로서 적잖은 치매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그 이유는 치매에 쓰이는 약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내과에서 처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치매 치료는 전반적인 그 환자의 환경, 과거사와 가족상황 등도 알아야 한다. 환자의 뇌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그 환자의 다른 질병들도 같이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환자의 가족과도 전반적으로 공동치료가 이루어져야 하다 보니 많은 경우 그 환자의 주치의인 내과의사가 치매 치료를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치매환자가 아니라 보호자의 정신건강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 할 때도 종종 발생한다.
지금 LA에는 노인인구가 적지 않다. 대부분 70대 중반이 넘으며 사별하고 혼자 사는 노인도 적지 않다. 자녀들과의 왕래는 아주 드물어진 둘만의 부부들도 많다.
지난 주, 추수감사절 연휴 후 필자의 병원을 내원한 많은 노인환자분들이 쓸쓸한 추수감사절를 보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에 아직도 가슴 한켠이 아리고 먹먹하다.
치매는 이렇게 고립된 노인 환자나 그 가족들을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시킨다. 다른 질병에 비해 가족들이 더 숨기고 싶어하는 한국정서는 이런 환자들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치료를 지연시킨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부모님을 한동안 뵙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잠깐만이라도 시간을 내 찾아뵙길 당부한다. 어린시절, 감기라도 걸려 고열에 시달리는 우리의 곁을 지키며 밤샘하셨던 분들이 바로 우리 부모님들이다. 그런 부모님들이 원치 않는 치매에 걸려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럴 때 잠시 찾아준 자녀의 손길은 다섯살 어린아이가 길을 잃고 울며 헤메다가 어머니의 손길을 잡은 것 만큼이나 반갑고 의지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