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길 목사
이연길 목사

믿음의 본질

이연길 | 두란노 | 248쪽

-내러티브 책과 설교로 유명하신 이연길 목사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이 자리에 있기까지의 여정을 한번 소개해 주시지요.

"예, 먼저 부족한 사람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제가 걸어온 여정을 말하기 전에 돌아보면, 저는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식도 부족하고 깨닫는 것도 둔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야 할 곳으로 보내시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지금까지 만들어 오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고밖엔 더 말할 게 없습니다.

저는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군목)를 마친 후 성경으로 목회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아주 작은 시골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교회는, 성경을 연구하며 가르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경 지식은 한없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늦게나마 장신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신약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성경공부가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100여 명쯤 모이던 젊은이들이 두 달이 못 되어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성경공부 방법론을 찾기 위하여 유학길에 오르게 되지요. 그리하여 루이빌신학교(Louisville Seminary)에서 수학하던 중, 당시 북미에서 성경공부 교사로 이름을 떨치던 월터 윙크(Walter Wink) N. Y. Union Seminary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는 내러티브란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성경공부 방법을 뭐라 정의할 수 없었지만, 후에 그것이 내러티브 방법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스토리로 성경 읽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고, 다시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내러티브 설교학자인 유진 라우리(Eugene Lowry) 교수, 그리고 내러티브로 구약을 풀어내는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들과의 만남이 오늘의 저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감사한 것은 서울 동일교회와 댈러스 빛내리교회 교인들입니다. 특히 빛내리교인들은 주일 오전 1부와 3부 예배 중간을 성경공부 시간으로 정하고, 매주일 성경공부를 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내러티브로 성경 전체를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완성된 성경공부 교재가 '말씀과 만남'이지요."

-목사님의 이력 가운데 내러티브학회 회장이 눈에 띕니다. 내러티브에 대해 정의해 주시고, 내러티브학회가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시지요.

"내러티브(Narrative)란 굉장히 폭이 넓은 장르여서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성경적 내러티브' 분야에서 말하는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Narrative'는 라틴어 'narrare'에서 유래한 단어로, '말하다' 또는 '무엇을 설명하다'는 의미입니다. 내러티브를 '서사'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바른 번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야기식'이란 표현을 좋아합니다. 내러티브는 내용만이 아니라 전달 방법까지 말하기 때문에, 좀 'moving'하는 감각을 띠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입니다.

혹자들은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을 혼합해서 사용하는데, 히브리적 내러티브에서는 이 두 장르를 혼동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스토리텔링이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면, 내러티브는 전달하려는 내용과 방법까지 함께 아우르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즉, 내러티브란 '예술적인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헬라적 내러티브와 히브리적 내러티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헬라적 내러티브는 주로 증명하고 논증하며 설득하는 방법이고(수사학), 히브리적 내러티브는 설득보다는 어떤 사건을 보여 줌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문학적 방법입니다. 그래서 묘사와 인물들의 대화 내지 행동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히브리적 방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강요한 부분이 없습니다. 담담하게 사건을 기술해 나갈 뿐입니다. 대신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묘사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할까요. 내러티브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곧 성경이 어떤 방법으로 쓰였는가를 살피며 그 방법에 따라 성경을 읽는 방법입니다.

내러티브란 '한 문장 안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학 형태'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복선이 깔려 있는 문학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문장에서 표면의 '이야기'와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콜롬비아신학교(Columbia Seminary)에서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교수와 심한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데, 그 교수는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닌 신학책이라 하고 저는 역사서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지요. 그런데 내러티브를 알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은 겉으론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면엔 누가(Luke)의 신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러티브가 북미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이런 내러티브 방법을 제가 한국에 소개하면서 자연히 연구하며 따르는 목회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런 모임이 자연스럽게 내러티브 학회가 된 것이지요. 처음에는 교수들과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고, 회장은 1년씩 돌아가며 봉사했습니다.

그 후 저는 미국으로 들어왔고, 현재 목회자 중심의 '말씀목회공동체'란 이름으로 내러티브 성경과 설교를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동체 대표로 일하고 있는데 현재 적극적 회원은 200여 명쯤, 동의하고 따르는 회원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5월 마지막 주 월-수요일 정기 집회를 갖고 있습니다. 저번에 두란노에서 나온 '슬로, 바이블'이 이 공동체의 작품이지요."

이연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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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로 성경 읽기(쿰란)'란 책도 쓰셨는데요.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내러티브는 히브리적 문학 형태입니다. 그래서 성경 내러티브(The art of biblical narrative)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내러티브는 성경을 기록한 문학적 방법이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내러티브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성경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질 뿐 아니라, 바르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읽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번역된 책도 전혀 나와 있지 않구요. 그래서 내러티브로 성경을 읽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아직 미숙한 상태지만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실 해석해야 하는 책이라기보다 읽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잘 읽기만 하면 그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경향은 성경을 해석한다고 도리어 본문을 왜곡시키거나 본래 의미를 흐리게 만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내러티브로 성경을 읽어야 비로소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러티브로 성경 읽기'는 바로 그 방법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어떻게 성경을 내러티브로 읽을 것인가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책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략 몇 권을 저작하셨는지, 특히 좋아하시는 저작들이 무엇인지 소개해 주시지요.

"예, 너무 많이 저술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40권은 넘는 것 같습니다. 주로 성경공부 교재(말씀과 만남 성경공부 시리즈)로, 신약은 완간되었고 구약도 거의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러티브 설교를 소개하기 위하여 저술한 '이야기식 설교학'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야기식 설교를 하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해 기본적인 내용을 소개하려고 저술했는데, 이처럼 많이 팔릴 줄은 몰랐습니다.

또 설교학을 강의하다 보니 성경을 내러티브로 읽지 않으면 내러티브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러티브로 성경을 읽도록 돕는 책들을 저술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록한 책들 중에 '에덴에서 가나안으로', '사사 시대로부터 다윗 왕국까지'가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사도행전' 주석도 저술했는데, 이 두 권은 차별화된 책이라 자부하고 싶습니다. 내러티브로 설교한 내용을 설교집으로 묶은 책도 몇 권 있지요. 그 중 처음 누가복음 설교집이 세 권으로 나왔구요, 에스더서 설교집이 가장 내러티브 설교로 내놓고 싶은 책입니다. 목회를 마치면서 내놓은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란 요한복음 설교집, 내러티브를 연구하다 터득하게 된 시를 모아 낸 시집 '그분 만나면 사랑되리'도 있습니다."

-최근 저작하신 '믿음의 본질(두란노)'은 어떤 종류의 책인지요.

"이번에 두란노 출판사가 저 때문에 수고를 많이 해 주셨는데요, '믿음의 본질'이란 책은 제가 일생을 연구해 온 성경을 총정리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에는 모순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개념을 가지고 산다면 앞으로 기독교는 사회에게서 외면을 당하게 되리란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설정한 교리적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까 하는 의구심도 들기 시작한 점이었습니다.

대학원에서 '로마서에 나타난 피스티스(믿음)'란 논문을 쓰면서,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내러티브로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은 단순 개념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포괄적 개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떠난 것만 '믿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떠난 때부터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삶 전체를 믿음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을 믿는 것(롬 1:1-4)'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삼위일체)과 함께 살고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여 하나님나라를 이뤄가며, 마지막에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까지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이 모든 내용을 믿음이란 주제 아래서 풀어가려 노력한 책입니다.

우리들은 간단하게 '로마서는 믿음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조금이라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로마서에서 믿음은 1-4장에만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6장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는 '믿음의 책'이라기보다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룬 '믿음의 삶의 책'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에서 이런 문제들을 섬세하게 다루려 노력했습니다."

-목사님이 '믿음의 본질'이란 책에서 오늘날 "믿음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요? 종교개혁 시와 비교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신앙의 변질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핵심 질문을 던지셨는데요,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많은 분들이 '오직 믿음'이라고 하면 행위(삶)를 완전 제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평신도들이 특히 '오직 믿음'을 좋아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지, 아니면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것이 믿음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번 믿으면 어떻게 살든 일단 구원은 받는 것이라 생각하고요.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따로 삶 따로 사는 자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관이 오늘 사회에서 교회가 따돌림을 당하는 근본 이유가 되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십자가와 부활을 지식으로 아는 것은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요한일서는 말합니다. 옛날 영지주의자들이 그런 믿음을 주장했거든요.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을 외친 것은 타락한 로마가톨릭이 구원을 돈 주고 사고파는 것을 반대하며 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삶을 외면한 믿음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많은 숙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루터의 로마서를 읽으면 마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만큼 믿음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삶의 자리가 없는 것은, 그 믿음이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고 야고보서는 말합니다(약 2:18).

만약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 성경에서 믿음과 동의어처럼 '(그리스도 안에) 거함',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생활까지 포함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겠는지요.

"첫사랑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요. 그렇다면 첫사랑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버렸다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첫사랑은 예수님과 결혼한 에베소 교인들이 신랑을 버리고 딴 남자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이 식으면 이혼의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 이혼당할 위기에 처한 교회였습니다. 첫사랑은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를 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요 주님 안에 사는 것은 곧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요 15:7, 10)."

-목사님께서 제시하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실천적인 차원에서 좀 더 자세히 소개해 주시지요.

"이 질문은 위 질문에서 이어지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질문이기도 하구요.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주님과의 관계에 너무나 많은 이물질이 끼어들었다는 말입니다. 성공신학, 물질만능, 세속적인 프로그램들, 교회 안의 직분들, 심지어 교회 안의 너무 많은 프로그램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했다면, 예배, 기도, 전도와 봉사 등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믿음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사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루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될 일도, 봉사를 강화한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구체적 방법은 ①말씀을 자세히, 그리고 깊이 반복해서 읽어야 합니다 ②그 말씀에 질문을 던지며 읽어야 합니다 ③읽은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④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⑤우리 모든 삶은 하나님 안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작에 대한 계획이나 비전 등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지요.

"이단들이 교인들을 유혹할 때 제시하는 내용이 요한계시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에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는 이단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평신도를 위한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고 싶습니다. 출판사와도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쳤구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가 있는 본문은 내러티브로 읽을 수 있지만, 바울서신과 같은 서간문이나 시편 등은 내러티브로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서신 내러티브로 읽기(에베소서를 중심으로)' 등을 저술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에베소서 내러티브 읽기는 작년 우리 공동체 정기모임에서 이미 다루었고, 금년에는 '히브리서 내러티브 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 그리고 선교지에서 성경 강의와 설교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은 이 땅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서 집회하다 '예수님을 몇 년 믿었는가?'고 묻지 않고 '주님과 함께 몇 년을 살아왔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예배 마치고 난 후에 '부끄럽지만 저는 주님과 함께 아직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어요'라고 대답하는 교인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요? 저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묻고 싶습니다."

/대담: 채천석 크리스찬북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