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인 과정을 살펴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섬세한 은혜가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합니다. 먼저 구교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조국의 선비들이 선교사가 오기 전에 스스로 신앙에 귀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서구로부터 들어온 신문물과 함께 기독교를 수용하였습니다. 외교관의 아들 이승훈은 사신단과 함께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았고, 그는 조선으로 들어와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은 이벽과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목회자가 있기 전에 자생적인 교회가 발생한 것입니다.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번역되어 부분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제물포 항에 들어왔는데, 이미 최초 성경은 1882년에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가져다 준 한문 성경을 서상륜, 백홍준 등이 번역함으로써 나온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였습니다. 이후 1885년에는 <마가의 전복음셔언해>가 일본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수정을 중심으로 번역되었는데, 조선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가 누렸던 최고의 은혜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개화와 독립을 지원하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는 영국의 제국주의를 통하여,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네델란드의 식민지배를 통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기독교를 거부하였습니다. 독립을 위하여 동남아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공산주의에 혹은 모슬렘에 귀의하였고, 기독교는 타도되어야 할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앞잡이로 인식되었습니다.
조선사회의 제국주의적 식민지배는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서구 열강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적 영향력을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을 통하여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천조대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강요하였지만, 서구의 선교사들은 민중을 개화시키고 독립을 이루기 위한 민족세력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자각을 위하여 뜻을 품은 자는 거의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3.1 운동은 기독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운동이었고, 신사참배 반대라는 운동을 통하여 교회는 민족정기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민족정신의 핵심을 제공하였는데, 임금에게 충성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기독교,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고난의 역사에 동참하는 기독교, 미래의 일꾼과 지도자를 배출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는 민주화의 성취와 발전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리더십을 행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는 민족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는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초대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프런티어를 상실하였습니다. 교회는 개교회주의에 빠져 비전을 상실하였고, 공공의 영역에서 자신의 메시지와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종이 되셔서 섬기기 위한 낮아짐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성탄을 맞이한 교회가 어떻게 낮아져야 할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대강절을 맞이하여,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 교회를 묵상하고 추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