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철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이석철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삶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광야와 같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우리는 고해와 같은 광야의 삶을 행복하게 통과해야 한다. 그 비결은 감사에 있다. 실제로 행복과 감사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서,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탈무드는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 축복은 광야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광야를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통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으로 불행하게 그 길을 지나갔다. 그들을 먹이시기 위해 내려주셨던 만나에 대해서도 불평했다.

그들의 불평은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불평이다. 매일 먹는 만나는 때론 맛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만나는 불평의 요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하나님의 공급이요 은혜이다. 아무리 고기가 먹고 싶다 해도 만나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광야는 위험하고 어려운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광야를 ‘통과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도 평생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게 ‘호화롭게’ 통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한다.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특별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평한다.

그렇게 불평불만으로 광야를 지나온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서도 행복할 수 없다. ‘젖’에 감사하지 못하고 ‘꿀’을 지나치게 추구하며 불만과 불행감에 빠져 살게 된다. ‘젖’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필요에 대한 공급이라면 ‘꿀’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보너스다.

물론, 꿀은 좋은 것이고 있으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꿀에 탐닉하다 보면 젖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불만에 빠질 수 있다. 꿀은 가끔씩 적은 양을 먹어야 맛있고 좋은 것이다. 우리의 입맛이 꿀에 길들여져 있으면 오히려 몸 건강에는 해롭다.

우리는 만나 같은 평범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범한 것의 가치를 무시하며, 특별하고 거창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대박’을 좋아한다. 그러나 평범한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면 덤으로 주어지는 것에 대한 감사가 가능하다. 행복은 작고 소소한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한참 동안 고생하여 네 잎 클로버를 찾았을 때 큰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투명한 비닐에 코팅하여 책갈피로 쓰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나는 행운 하나를 찾기 위해 수많은 행복들을 짓밟고 다녔던 것이다.

우리는 ‘감사의 상대성 원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욕구 수준을 높이면 만족 수준이 낮아지는 원리다. 반대로 욕구 수준을 낮추면 만족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 하나가 카톡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음은 비울수록 더 편안해지고 행복은 더 커지는 것이니,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고 밝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요?” 감사의 상대성 원리다. 실로 적은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평하는 사람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갈 때 사실상 부족함이 없었다. 다음과 같은 성경 기록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 2:7)

광야 기간 중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분했지만 백성들의 과도한 욕망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고’ 불평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족함을 느낀 것은 실제로 필요한 욕구 때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탐욕스런 삶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려고 했던 것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11:4)고 덩달아 불평을 시작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불행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감사의 상대성 원리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닌 ‘상대적 특혜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가졌다는 것만을 보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많은 것과 더 좋은 것을 가졌는지를 생각하면 더 행복해지는 법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우리는 감사하고 행복해야 할 조건이 많이 있음에도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불만과 불행의 삶을 살아간다. 베이징 올림픽 때 우리나라는 배드민턴 여자 복식 부문에서 은메달을 땄다. 그런데 시상식에서의 분위기는 동메달을 딴 중국 팀보다 더 침울해 있던 것이 우리 선수들이었다. 이처럼 감사하고 행복해야 할 상황인데도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오히려 불만과 불행에 빠지는 것이 우리들의 서글픈 모습이다.

가장 좋은 것은 ‘감사의 절대성 원리’를 배우는 것이다. 상대적인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감사는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감사한다. 이 절대적 감사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궁극적인 감사다. 그 경지에 들어갔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영국을 떠나 온 청교도들 절반이 죽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일로부터 시작됐다. 결코 상황과 조건이 좋아서 감사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절대적 감사의 경지로 성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가는 길,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6) 이것이 오늘도 이 광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