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의 대중화 속 믿음(아브라함)
악은 세상 속에서 만연하면서 대중화한다. 아브라함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성경 인물 중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대하 20:7).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브라함 시대를 '하나님 도성의 청년기'라고 말한다. 그런 인정 속에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 아브라함조차 세상에 만연한 악의 세력 속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우상을 섬기는 지역이었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命)으로 고향을 떠났음에도 사회적으로 만연한 악의 장중에서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오랫동안 불임(不姙)에 시달렸고, 급기야 사라는 경수가 끊겼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상속자를 약속하셨고 그는 그 약속을 믿었으나, 기다림에 지친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듣고 급기야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취하고 만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악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까지 대중화된 악 앞에서 자연스럽게 매몰되고 그 태도와 결과를 합리화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곧 언약의 자손 이삭과 갈등 구조를 만든다. 하갈과 사라가 인간적 갈등에 빠지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오늘날까지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손들이 일으키는 종교적·민족적 갈등을 보면, 악의 구조가 사회 속에서 대중화되면서 얼마나 끈질기게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괴롭히는가를 알 수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 아내 사라를 두 번씩이나 권력자들에게 스스럼없이 인계하려고 한 사건은, 가나안 지역에 얼마나 남녀 차별이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어거스틴은 아브라함을 악에 물들게 만들어 버렸던 두려움은 바로 심판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렇게 악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에게조차 대중화되었던 것이다.
2. 악한 구조 속에서의 삶의 모범(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 진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중화된 악의 구조' 속에 매몰되어 살았다면, 이삭은 악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좀 더 신앙적 삶인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노년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이삭은, 마치 아브라함과 야곱의 연결고리 같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삭은 미숙한 우리 인간이 대중화된 악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순종의 모범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 그도 아브라함처럼 약속된 신탁(信託)의 인물이었다(창 26:15). 이삭은 약속된 언약의 할례를 받았으며, 모리아에 있는 한 산에서 결박당해 번제로 드려질 준비까지 순종하였다. 마치 털 깎인 어린 양처럼 십자가를 지러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아무리 신앙인이더라도 이삭처럼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자녀란 늘 자신이 부모에게 불효자임을 인식할 뿐이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을지라도, 이삭은 분명 악이 구조적으로 대중화된 사회 속에서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된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소실도 두지 않았고,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고 한 아내로 만족하였다. 이방인들로 넘쳐나는 가나안 땅에서 그는 믿음으로 살며 노총각으로 있다가, 40세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예비된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를 만난다. 이들 부부도 아브라함-사라처럼 난임(難姙) 부부였다. 그들이 자녀를 얻은 것은 부부가 된 지 20년이 지난, 이삭 나이 60세 때였다. 바로 쌍둥이 자녀 에서와 야곱이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의 이삭도 미숙한 인간이었다. 그는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삶에서 예수님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그 누구보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산 이삭도, 결국 악의 구조 속에서 미숙한 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3. 악은 예정되었는가(야곱)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면 인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하는 것이 창조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 더 좋다고 보셨다(창세기 1장 참조).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악을 근절시키지 않으신 것일까? 믿음과 순종의 사람 이삭의 쌍둥이 자녀 가운데 왜 에서는 버리고 야곱은 택하신 것인가? 에서는 이삭이라는 언약의 후손으로서 왜 망령된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 왜 하나님은 쌍둥이를 차별하신 것일까? 이것은 악의 예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의지의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신학적 논쟁은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양측이 아주 팽팽하다. 따라서 이 사안은 신정론을 추적하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로, 여기서 심각히 다룰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신정론을 다루는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악의 구조 속에서 인간은 이렇게 에서와 야곱처럼 갈라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본주의가 아닌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보면,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보다 그리 도덕적 품성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다. 인간은 그 해석과 행동 모두에서 신앙의 유무를 떠나 악의 존재 앞에 이렇게 미숙한 것이다. 미숙하다는 면에서 이렇게 비슷한 심령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도대체 어떻게 에서와 전혀 다르게 "거짓말쟁이"에서 "이스라엘(하나님을 이긴 자)" 칭호를 듣게 된 것일까? 하나님은 이 우주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우리 인간이 핑계할 수 없는 신비적 예표를 주셨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즉 그것은 십자가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대드라마를 향한 천상적 예표를 보여 준 구약 사건이라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역사는 예정이냐 자유의지냐를 떠나, 인간을 영벌(永罰)의 길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임을 암묵적으로 보여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밀로 남아 있다"는 벌콥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의 고백에 우리도 함께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오직 깨달은 자는 어거스틴처럼 오! 복된 죄악이여!(felix culpa!)라는 패러독스적인 고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