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대학교 정문에 95개 조항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종교개혁 498주년을 보내면서 루터가 이슬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에도 이슬람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슬람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1970년에는 3천7백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약 25만 명이다. 비공식적으로 40만 명이다.
한국에서 이슬람이 성장하는 이유는 이민이 가장 크다. 한국에 정착하는 외국인 가운데 약 20%가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경기개발연구원에 따르면 2030년 한국 내 외국인 인구는 약 531만 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전체 인구(5,147만 명)의 약 10%가 된다. 그렇다면 무슬림은 약 100만 명이 될 것이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2050년에 이르면 한국 이슬람 인구는 약 300-4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이 한국으로 밀려오고 있다. 유럽에서도 그랬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 강력한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 세력이 유럽의 심장이었던 비엔나(Vienna)를 포위하였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 종교개혁의 다양한 배경을 형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 루터 시대의 이슬람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기 전의 마지막 전투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헤라크리우스(Heraclius, 재위 610-641년)와 벌인 것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무함마드 군대와 맞섰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무슬림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비잔틴 기독교 제국을 정복해 나갔다. 10년 후 이슬람 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후 70년 동안 서쪽으로 진군하여 북부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했다. 북부아프리카를 강화한 후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남부 프랑스와 지중해 서부를 점령했다. 오스만과 터키의 술탄 메멧 2세(Mehmet II, 재위 1452-1481) 때인 1453년에 고대 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로 인해 터키 군대는 발칸 반도와 헝가리에 진주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힘을 다뉴브 강까지 뻗쳤다. 메멧 2세는 여세를 몰아 발칸 반도 안으로 유럽의 중심부를 향해 터키 제국의 경계를 넓혀 나갔는데, 1475년에는 크림반도(the Crimea)를 탈취하였다. 이는 루터가 태어나기 불과 8년 전이었다.
나아가 1500년에는 알바니아(Albania)를, 1512년에는 몰다비아(Moldavia)를, 1516년에는 루마니아(Romania)를, 1517년에는 몬테네그로(Montenegro)를 복속시켰다. 1517년은 바로 루터가 34살의 나이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때다. 1529년에는 드디어 오토만의 군대가 비엔나를 포위하게 되었다. 1529년 비엔나에서 그 걸음을 멈추게 되기까지, 이들은 계속하여 유럽 중앙으로 전진해 들어왔던 것이다.
루터의 생애가 1483-1546년에 걸쳐 있으며 「터키에 대항한 전쟁에 대하여」와 「터키에 대항하는 군대 설교」가 1529년 작품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슬람의 도전이야말로 루터에게 심각한 자극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특별히 그 때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이념적으로 고무된 폭력의 출현, 기독교와 무슬림 사이 전례 없는 수준의 자각과 접촉, 이슬람 문화 재기과 유대-기독교 문화의 붕괴 등이었다. 한국도 교회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슬람이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위협 앞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듯이 한국교회도 다시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2. 루터의 이슬람 이해
루터는 1528년 10월 9일 "터키인의 전쟁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을 통해 루터가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첫째, 루터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반대하고 있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이슬람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루터가 반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이슬람 군대를 보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는 이슬람을 향해 칼을 들고 벌이는 전쟁을, 하나님에 대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루터는 "이슬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이들을 징계하시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했듯이, 기독교의 타락이 이슬람이라는 징계를 불러 왔다고 본 것이다.
둘째, 루터는 이슬람과의 외적인 전쟁보다는 먼저 내부의 적(敵)인 "기독교인들의 부패와 타락"을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외부의 적인 이슬람보다 내부의 적인 교황청이 더욱 악하다는 것이다. 교황청의 사기꾼들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이슬람 군대와 싸우도록 부추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슬람 군대보다 내부적인 부패와 거짓과의 싸움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교황청 뿐이겠는가? 기독교인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회개가 이슬람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고 루터는 보았던 것이다.
셋째, 루터는 이슬람과의 전쟁은 영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 군대와의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사탄과의 전쟁이라고 확신하였다. 루터는 이슬람의 신(神)을 사탄으로 보았고, 이 영적인 전쟁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기도를 통해서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이슬람이라는 채찍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기도로써 이슬람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넷째, 루터는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敵)으로 인식하였다. 1529년 이슬람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를 포위한 소식을 들으면서, 루터는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며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터키인에 대항하는 군대 설교"에서 루터는 말세에 예언된 두 폭군을 교황과 이슬람으로 해석하고, 다니엘서 7장의 4번째이자 마지막 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열 뿔을 제국 내의 나라들로, 그리고 뿔들 사이에 있는 '작은 뿔'을 이슬람으로 이해하였다. 교황을 "위선의 가면을 쓰고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로, 이슬람을 "선하고 정결한 덕목을 지닌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계략을 가진 적그리스도로" 이해했다.
다섯째, 이슬람과의 싸움에서 기도를 통한 영적 무장이다. 브란덴부르크 황태자 요아힘이 슐레이만 2세와의 1532년 전쟁에서 루터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을 때, 루터는 "위로의 편지(Trostbrief)"를 보내고 기도 후원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슬람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던 1539년 2월 말, "모든 목사에 대한 권면"이라는 글을 통해서 "목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과의 싸움에 기도로 무장할 것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톨릭교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취급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고 감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라"고 했다.
3. 루터의 이슬람 이해에 대한 적용
루터는 이슬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통하여 높은 식견(識見)을 가지고 있었다. 1542년 아랍어에 능통한 취리히 신학자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e Bibliander, 1506-1564)가 꾸란의 번역을 출판하려고 할 때 바젤시의회의 반대에 부딪히자, 루터는 비블리안더를 적극 지지했다. 루터는 "설교자가 꾸란을 읽게 되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견실히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더욱 담대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도록 권고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루터가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 신앙을 진지하게 평가했다. 루터는 "무슬림들의 의식과 도덕의 진지함과 철저함이 기독교인들이나 수도승·성직자들보다 더 나아서, 단지 3일 동안만 무슬림과 함께 살아도 기독교 대신 이슬람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정도로 무슬림의 도덕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슬람의 의식이나 도덕보다 훨씬 더 고귀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율법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슬림으로 개종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가 염려했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약 80%가 기존에 교회에 출석했던 사람(Back Sliding Christian)들이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율법(律法)과 은혜(恩惠)의 차이를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
루터가 이슬람의 공격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놀랍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황금만능주의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으로 이슬람이 사용되고, 그래서 이슬람이 밀려오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오늘날 이슬람보다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최근에 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장로로서, "일본에서 자본금이 들어오는데, 선교회 법인을 통하면 세금이 면제된다"며 그렇게 해 주면 일정 금액을 선교회에 주겠다는 것이었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시대처럼 타락한 것을 보는 듯했다. 장로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교회를 통하여 비자금을 세탁하고, 목사가 목사를 칼로 찌르고, 각 교단 총회에서 금권선거를 하는 타락한 현실을 보면서, 루터의 말은 더 크게 들려 온다.
"우리가 먼저 싸워야 할 대상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적인 부패와 거짓이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의 거룩을 위한 싸움을 우선해야 한다.
루터는 종말론적 선교 이해와 선교의 긴박성을 가지고, 종말이 오기 전에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무슬림을 대할 때 형제 사랑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현대 이슬람 선교에서 교만한 태도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루터는 기독교인들의 믿음, 순종, 경건, 용기, 인내 등과 같은 덕목이 무슬림을 능가할 정도가 될 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미국 풀러신학교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 700명을 10년 동안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가장 큰 회심 이유는 기독교인 친구들의 영적·이타적 삶이었다. 따라서 루터의 선교 전략은 현대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으로 대체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가 변질되고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이슬람이 몰려왔고, 그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그 주권을 이슬람에게 내어 주고 말았다. 중동이 그랬고, 유럽이 그 길을 가고 있다. 한국에도 이슬람이 다가오고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개혁을 논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이슬람으로 인하여 종교개혁을 가속화시켰던 마르틴 루터의 말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내 말은 이슬람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
유해석 선교사는
총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에서 공부했고, 영국 웨일스대학교 신학/이슬람학부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수학했다. GMS 파송선교사로 오엠선교회와 협력해 이집트에서 사역했으며, 현재 FIM국제선교회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생명의말씀사)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