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초기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다섯째 요인은 한국 교인들의 전도열이다. 세계 4대 종교, 즉 기독교, 불교, 이슬람, 힌두교 가운데 전도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종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이 두 종교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전도한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바울 사도로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전도인들과 선교인들의 목숨을 건 전도로 교회 영역을 확장한 기록이다. 초기 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지와 원시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도대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 역시 죽음을 전제로 한 선교의 대열에 선 사람들이다. 한국에 나와 선교하다 생명을 잃은 선교사, 부인, 자녀들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이런 본을 본 한국 기독교인들의 전도열은 두드러졌다. 한국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 자기 혼자만 신앙을 갖는 게 아니었다. 이 복음을 열심히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갖도록 권고했다. 초기 교회가 세례 후보자들에게 세례 조건으로 내세운 몇 가지 가운데, ‘1인 이상 전도’ 항목을 둔 것도 전도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교회 회원 즉 세례교인이 되는 조건에 대해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 아더 브라운(A. Brown)도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말하려 하는 것은 교회 회원이 되기에 적합한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세계적 선교 잡지 <세계선교조명>(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서도 한국에서 교회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기를 시작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기록했다.

1909년에 일어났던 ‘100만 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 때 ‘날연보’(日捐補: day offering) 운동이 일어났다. 날연보란 날, 즉 시간을 연보(헌금)한 것이다. 헌금으로 드린 시간에 전도하는 운동은 한국교회 성장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이 운동 기간 동안 전국으로 수십만 날이 헌금되었다. 이 헌금된 시간에 전도가 이루어졌다. 초기 교회는 새로 입교하려는 교인들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학습문답을 했다. 그 문답 내용 중 다섯째가 “먼저 자신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모든 교리를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므로 자기 가족을 설득하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일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순종케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가족 전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네비어스 정책 중 자전(自傳)운동과 맞물려 더욱 가속을 받았다. 한국 교인들의 전도열이 아니었다면 한국교회 성장은 결코 기대할 수 없었다.
의주의 청년들이 만주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성경을 번역했다. 그 번역된 쪽 복음서를 비밀리에 다량 휴대하고 귀향했다. 귀향 후 그들은 권서(勸書) 혹은 매서(賣暑)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도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런 한국 교인들의 전도열로 한국교회가 신속히 성장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여섯째,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익히기 쉽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순 한글 성경이 일찍 확보되었다. 또한 초기부터 성경공부, 즉 사경회를 열심히 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백낙준 박사는 한국의 개신교가 일찍이 성경번역에 애쓴 일을 한국 천주교회와 대비하여 언급한 바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교회를 창설한 이래 1866년까지 8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동안 쪽복음서 한 권이나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번역하려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천주교회가 개신교회보다 100년이나 일찍 한국에 전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 교세는 개신교의 삼분지 일에 불과하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번역, 보급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이 번역된 후 국내로 유입되어 반포되었다. 일반인들이 이 성경을 읽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언더우드가 1887년 평북 의주에 갔을 때 100여 명이 몰려나와 세례 받기를 청원했다. 그는 그들을 한 사람씩 문답하고 그 중 33인을 합격시켰다. 언더우드는 그들을 목선에 태우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 종교를 엄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한국 초기 교회의 ‘요단강 세례’라 일컫는다. ‘성경의 교회,’ ‘성경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가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보고서에 보면 감리교회의 한 교인은 신약전서가 번역된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의 하루 일당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성경을 샀다고 기록했다.

이와 연결해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한국에 문자와 언어가 통일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나 중국과 같은 나라는 종족들 간의 언어가 서로 달라 한 가지 문자나 언어로는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보급이나 전도가 극히 어려웠다. 선교사들이 현지에 들어가 현지어를 배우고 익히는 데, 수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현지어를 익혀 성경을 번역, 출판해서 보급하기 시작한 후, 성경을 갖고 산 하나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가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럼 다시 그들 언어를 습득하는 데 또 장구한 세월을 요했고,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하는 데에 또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더러는 말은 있으나, 문자가 없는 종족도 많았다. 그러면 선교사들은 그들의 언어에 따라 문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 후, 그 문자를 그들에게 가르치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해야한다. 그러나 한국어는 선교사들이 감탄할 정도로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이다. 이렇게 쉬운 문자를 창제한 세종대왕을 주신 것은 한국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보아도 좋다.

또 한국은 한글과 한국말이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조선 8도에 안 통하는 곳이 없어 한국의 복음화가 신속했다. 이 점에 대해 선교사 스위러(W. B. Swearer)도 ‘한 민족이 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이 나라 복음화의 좋은 조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언어를 통일, 문자의 통일은 한국 복음화의 첩경 중 중요한 요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