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Photo : ) 김인수 목사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류 구원의 길이 여기 담겨 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이후 1500년까지 성경은 한 두 언어로만 번역되어 있어 누구나 읽을 수는 없었다.

또 가톨릭교회는 평신도의 성경 읽기를 엄금했다. 1500년 경까지 금속활자가 발명되지 않아, 그 이전에는 손으로 쓴 수기본만 있었기 때문에 그 수효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교회개혁가 마틴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면서,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 출판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절대라 여겨오던 교종(교황)은 절대가 아니고, 오직 성경만이(sola scripture) 절대라 선언했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성경의 교회이며, 성경이 이 교회의 중심이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와서 맨 먼저 착수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성경번역 사업이다. 한국에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이전, 벌써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다. 물론 이 성경은 전체가 번역된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번역 출판된 쪽복음서였다.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된 쪽복음서가 국내에 유입되어 반포됐다. 따라서 내한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지 선교사들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전에 번역된 성경이 번역상의 오류와 용어의 불일치 등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에서 성경번역 사업을 맨 먼저 실행한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이미 번역된 것들이 "중국어 단어들로 가득 차 있고... 형편없는 철자와 형편없는 인쇄" 때문에 처음부터 번역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번역의 어려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펜젤러는 한글 성경 번역이 "두 나라 사이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것과 같다. 파나마 운하 개설 공사가 이보다 더 어려웠겠느냐?"고 난감해 한 바 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더불어 그들의 어학선생 김정삼, 김명준, 이창식 등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1887년에 1차 번역이 끝났고 바로 출판 작업에 들어갔다.

1887년 초, 언더우드가 새로 번역한 마가복음을 인쇄하기 위해 일본에 체재하고 있을 때 주일(駐日) 미국성서공회 대표 헵번(J. C. Hepburn)은 그에게 성경 전체를 번역하기 위한 번역위원회를 구성하라 충고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언더우드는 곧 감리교 선교회에 성서번역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선교사 전원이 모여 성경의 한국말 번역이나 또는 그 번역의 감수를 목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의안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선임됐고, 위원장에는 언더우드가 선출됐다. 언더우드는 이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16년까지 계속 위원장 임무를 맡아 일했다. 따라서 언더우드가 한글 성서번역에 세운 공로는 그 어떤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보다 지대하다.

위원회는 임시 헌장과 세칙을 채택했는데, 내용은 상임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그리고 수정위원회를 두기로 한 것이다. 1890년 6월 상임성서위원회는 2년 내에 신약전서 전권의 시험판(試驗版)을 내놓을 2인 위원을 임명했다. 2인 위원은 언더우드, 스크랜톤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을 착수하기도 전에 안식년으로 떠나, 이 사역은 순연될 수밖에 없었다. 1893년에 이르러 조직을 개편하고 위원도 추가하여 성서번역상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성경번역에는 신중을 기하고 철저한 심의과정을 거쳤다. 첫째, 선교사들이 조사들과 함께 번역을 한다. 둘째,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여 그들의 견해를 듣고 수정한다. 셋째, 다시 다른 번역자들이 읽고 초고를 개정한 준비 역본(譯本)을 작성케 한다. 마지막으로 위원회에서 한 절씩 읽어 가면서 토의한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표결로 확정짓는 세심한 과정을 거치는 원칙을 정하고 번역에 임했다.

1896년까지 신약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성경은 2단계를 통과한 역본이 없었다. 그러나 성경 수요가 빗발치자,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먼저 인쇄하여 배포했다. 1897년 위원회는 제2단계 과정을 생략하고 실행위원들이 공역(共譯)하는 형식으로, 1897, 1899, 1900년 세 차례에 걸쳐 번역본을 점검했다. 1900년 5월 최초의 대자(大字) 신약성경 12,000부가 감리교출판사에서 출판됐다. 소자(小字) 신약성경 15,000부와 복음서 사도행전 합부본(合部本) 10,000부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인쇄됐다.
중국은 완전 번역된 신약성경을 갖기까지 첫 선교사가 들어온 후 50년이 걸렸는데 한국은 불과 15년이 지난 후였다. 신약성경의 출판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서울에서 일하던 모든 선교회와 각 기관 관계자들이 정동감리교회에 모여 드렸다.

신약번역이 끝나자 번역위원회는 바로 구약 번역에 착수했다. 구약은 분량에 있어서 신약과 비교할 때 몇 배 많았다. 번역위원들이 갖가지 일들로 번역에만 매달릴 수 없어 그 진행은 매우 느렸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1910년에는 드디어 구약이 완역됐다.
그 이듬해에 이것이 출판되어 한국어로 된 신구약성경이 햇빛을 보게 됐다. 한국인들이 비로소 참 진리인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이 신구약성경의 완역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번역자들이 각고의 노력을 한 크나 큰 결실이다. 성경전서가 출판된 일에 대해서 장로교선교부에서는 본국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1911년은 성경 전체를 완성한 해로서 기록되어질 것이다. 이 해는 킹 제임스 판(King James Version)이 출판된 지 301년이 되는 해이지만, 한국 언문성경이 출판된 원년이 되는 해이다. [성경공부를 하는] 반(班)들에게 이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서울 선교부는 이 일을 위해 크게 공헌한 세 분들, 언더우드 박사, 게일 박사, 그리고 뻬에터스 씨에게 찬사를 드리는 바이다."

이 성경은 1937년에 전면적으로 개정이 됐는데, 이 개정판을 개역(改譯)성경이라 부르고, 개정 이전의 본래의 것을 구역(舊譯)성경이라 부른다.

성경은 철저히 한글 전용으로 되어 있고, 또한 쉬운 말을 골라 쓰려고 애를 썼다. 따라서 한글을 터득한 사람은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읽을 수 있어 성경 읽기 일상화에 큰 공헌을 했다. 그 후 성경은 여러 번역본이 나와 다양한 성경이 현재 사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