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성 목사.
(Photo : ) 김지성 목사.

세상은 ‘약속’이라는 전제 하에 움직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문자도 약속입니다. 알파벳의 각 문자들은 ‘이렇게 발음한다’라는 약속과 더불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J’는 한글의 ‘ㅈ’ 발음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글인 한글의 자모음도 고유의 발음 약속을 전제로 사용됩니다. 글을 읽는 독자는 이 무언의 약속을 기억하며 글을 읽는 것입니다.

일상에 사용하는 단어도 약속입니다. ‘집’이라는 단어는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사전이란 각 단어에 대한 어떤 정의를 약속했는가를 알려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로 소통을 이룰 때 말하는 자나 듣는 자는 이 약속을 떠올리며 대화를 합니다.

법도 일종의 약속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의 교통법은 자동차 운행을 ‘우측통행’으로 한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고속도로나 일반 도로로 운행되는 차량들은 반드시 오른쪽 차선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차량 운전자들이 법을 법전에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무시하는 운행방법을 사용한다면 대형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약속의 한 형태입니다. 운전자들은 운전시 항상 이 약속을 떠올리며 운전을 합니다.

시간도 약속입니다. 하루 중 특정한 시기에 숫자를 붙인 것이 시간입니다. 그 특정한 시각에 사람들은 똑같은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숫자를 떠올립니다. 만약 시간을 알려주는 숫자가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르다면 엄청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은 생활 속에 깊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은 또 다른 약속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합니다. 약속을 하지만, 그것을 지킨다는 의지가 없다면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혼란만 깊이 가중될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무언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집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그리고 사람을 섬기는 장소라는 약속하에 세워진 곳입니다. 그런데 각기 자기 나름대로 교회를 정의하고 교회생활을 다룬다면 교회생활은 자칫 갈등만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상의 많은 영역이 무언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교회생활은 성경의 기초 하에 이루어진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는 각별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빠지는 것은 약속위반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도 약속위반입니다. 동시에 사람을 섬기는 일도 소중히 여겨져야 합니다. 교회의 문턱을 넘었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삶이 약속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 존재하듯, 교회생활도 약속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생활의 약속을 존중합시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