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김범수 목사.

무엇이든지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멋있게 일을 하는 사람을 가르켜 "칼 같아!"라고 한다. 더 이상 흠 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이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한 사람은 쉬지 않고 계속 도끼질을 하며 장작을 팼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한 시간 패고, 쉬고, 한 시간 패고 쉬고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쉬면서 장작을 팬 사람이 쉬지 않고 장작을 팬 사람보다 더 많은 장작을 팼다. 그래서 어떻게 장작을 많이 팰 수가 있었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이러했다. "당신은 계속 장작을 팼지만 나는 쉬는 동안에 도끼날을 갈았습니다." 그렇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서는 예리한 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칼끝만 예리한 것이 아니라 요즘 말로 '엣지(Edge)'가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여자 재즈 가수를 말하면 윤희정을 꼽는다. '세노야 세노야'를 부른 윤희정은 재즈의 매력에 빠져 노력과 연습을 했다. 평범한 가수에서 이제는 재즈가수에서 에지가 있는 가수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 행동, 웃음, 유머, 눈빛 등은 청중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인생의 좌우명으로 '넘버 원(No. 1)'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온리 원(only one)'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일등이 되기보다는 오직 나외에 그것을 하는 사람이 없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그녀의 칼끝은 예리하다고 볼 수 있다. 칼끝이 예리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칼끝이 예리하지 않으면 연설가는 청중을 설득할 수 없고, 연기자는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없고, 사업가는 이익을 남길 수 없다. 누구나 칼은 다 한 자루씩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칼이 지금 녹슬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영국의 유명한 부흥 설교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길 원한다." 우리의 칼은 혹시 녹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 칼을 써야 한다면 다시 갈아야 한다. 갈고 갈아서 닳아 없어진다고 해도 오늘 예리하게 갈아야 한다.

칼은 예리해야 하지만 말은 여리해야 한다. '여리하다'는 말은 심성이나 감성, 그리고 마음이 악하지 않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말이라는 것은 관계와 소통을 위해 참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길에도 길이 있지만, 말에도 길이 있다. 그래서 말길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말을 하는데 말을 듣지 못한다면 말을 하는 사람이나 말을 듣는 사람이나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고, 시원하게 할 수 있고, 조리 있게 할 수 있고, 박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귀에다 하지 않고 마음에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마음에 말을 하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을 이루게 된다. 어머니가 아이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아이가 하는 말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이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을 잘못 알고 있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해서 소통하고 관계를 맺었다고 말할 수 없다.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마음을 열어 말하고 듣지 않으면 그 수많은 말들은 공중의 언어가 되어 버린다. 가슴의 공책에 기록되어 남아 있지 않는다. 소통은 입이 아니라 마음이다. 설령 말이 서툴더라도 그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면 소통이 된다. 어떻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말이 안되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바로 말이다. 그래서 말은 여리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 25:11)

말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산 사람도 죽일 수 있다. 경우에 합당하게 여리한 말로 사람의 영혼을 부드럽게, 따뜻하게, 흐믓하게 하는 언어의 장인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