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혁 장로
(Photo : 기독일보) 김영혁 장로

지금의 서을 마포구 합정동 145-8번지 절두산 일대를 칭하고 있는 이곳은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순교적 신앙이 살아 있고,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이땅에 복음을 전해준 최초의 선교사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를 전해주어 한국 근대화에 공헌하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 그리고 한국에 와서 죽은 이국인이 묻혀있는 곳이다.

이곳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공식 명칭은 ‘서을외국인 묘지공원’인데, 이곳 묘역 면적은 13,224㎡(약4,000평)이다. 1890년 10월 24일 개설허가를 받은 이곳은 2012년 12월 현재 415기의 무덤이 있다. 이중 선교사나 그 가족은 145기(가족포함)이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복음의 증인들이 의료시설 부족으로 애처롭게 풍토병과 사고로 희생한 선교사들과 아이들이 함께 묻혀 있는곳, 묘의 3분의 1 이상이 어린아이들의 묘 이다. 이들 중에는 태어나 하루나 이틀을 못살고 이 곳에 묻힌 아이들도 있다. 이곳 양화진이 외국인 묘역이 된 경위는 의료선교사 헤론(John W. Heron)의 죽음이 동기가 된다. 1885년 6월 21일 내한한 의료선교사 헤론(Dr john W.Heron)은 제중원에서 일하던 중 1890년 7월 이질에 걸렸고 7월26일 토요일 오전 8시에 서울에서 운명했다. 그의 임종을 앞두고 동료 선교사들은 매장지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고 당시 미국공사 허드(Augustine Heard)를 찾아가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조선에 부임한지 겨우 2달 남짓한 총영사 허드 공사는 서울에 외국인 매장지 문제가 정리되지 않음을 알고 놀랐다. 개항지인 인천에는 1883년에 이미 외국인 매장지가 설정되어 있었다. 허드 공사가 부임하기 전에 서울에서 2건의 외국인의 장례가 있었는데 이때는 인천까지 운구하여 매장하였다. 그러나 7월은 가장 무더운 날씨 인데다 당시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인천항 해안 언덕까지 운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공사 허드는 조선국 교섭통상사무 독판 민종묵에게 ‘외국인 장지 확정요청’ 공문을 작성하여 알렌을 통역으로 대동하여 직접 통상사무아문을 방문하였다. 헤론의 죽음이 임박하여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속한 처리를 요망하고 기대했으나 헤론이 임종했던 7월 26일까지 장지가 결정되지 못했다. 장례식은 27일주일 오후 5시 30분에 동료 선교사들의 주제 하에 거행되었다. 주한 선교사들은 서울 가까이 묘지로 쓸만한 장소를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 지정해준 곳은 한강 건너편 야산 기슭 모래밭 이어서 묘지로는 적절치 못했다. 그래서 그날 오후 헤론은 미국공사 사택 정원에 임시로 묻혔다. 1893년 10월에는 미국, 영국, 독일, 불란서, 러시아 등 5개국 공사가 공동명의로 조선 정부에 양화진을 ‘외인묘지’로 공식 승인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승인되었다. 이로서 미국공사 사택정원에 묻혀있던 혜론 선교사를 양화진으로 이장하여 묻힌 첫 서양인이 되었고 그의 죽음이 외국인 묘지 확정의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1904~5년에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확장을 요청 하였고 1905년에 인준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미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들의 대표가 묘지기를 두고 관리해 왔다. 그런데 1913년 7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토지대장에는 이곳 양화진은 ‘경성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록되어 있다. 1942년 5월 22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의 모든 외국인의 재산을 ‘적산’으로 압류하였음으로 양화진의 외국인묘지도 동일한 운명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미 군정하인 1946년 10월 1일자로 다시 ‘경성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기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6월 17일자로 재단법인 한국기독교 백주년기념사업회(이사장 한경직)로 그 소유권이 넘어오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부터 실제적인 묘지 조성이 이루어졌고, 이곳에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동시에 ‘경성구미인묘지’는 ‘서울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은 무관심 속에 잊혀진 역사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그 100년의 역사를 보내면서 돌아보기 시작했고, 양화진은 역사를 간직한 기억의 땅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86년 출간된 전택부 장로의 ‘이 땅에 묻히리라’(홍성사)나 정연희 권사의 소설 ‘양화진’(홍성사,1986,1992)이 숨겨진 역사의 땅을 기억의 땅으로 소생시키는데 다소 영향을 주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107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중 38개의 십자가는 각 나라와 시대, 교파별 배경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 타블렛(Tablet) 형태의 비석 속에 새겨진 69개의 십자가는 여러 문양으로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지만 종족과 방언과 민족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라는 우주적인 통일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돌아보면 유난히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헐버트가 묻힌 곳도 그 하나이다. 우선 헐버트의 묘비명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호머 헐버트(Homer B.Helbert), 1863년 1월~1949년 8월. 비전의 사람이자 한국의 친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ed in korea then in Westminster Abbey)” 그리고 아래의 글귀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일천팔백육십삼년 일월 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일천구백사십구년 팔월 오일 서울에서 별세.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팔월 삼십일일, 헐벗박사 장의위원회세움.” 헐버트가 어떤 분이었기에 “한국의 친구”라고 했을까? 그는 유니온신학교 재학 당시 조정의 초청을 받고 1886년 6월 내한했다. 처음에는 관립 소학교 교사로 있었으나 육영공원이 설립되자 그해 8월부터 외국어 교사가 되었다. 1894년 육영공원이 폐교하게 되자 그는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일하게된다. 그는 1903년 우리나라 YMCA 창설의 주역으로서 초대회장이 되기도 했고,‘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배일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운이 기을때 고종황제는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를 밀사로 미국에 보내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의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비밀조약 가츠라테프트조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침약을 묵인해 주려했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지는 못했으나 헐버트는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운명을 슬퍼했다. 그는 ‘전환기의 한국(The Passing of Korea)’을 써서 한국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실로 그는 격변기 한국에서 한국인의 처지를 함께 괴로워했던 한국의 친구였다. 그러했기에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소망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외국인 묘역은 양화진에만 있는것은 아니다. 이땅에 온 선교사들이 양화진 아닌 다른 곳에도 묻혀 있다. 캐나다 출신 초대 선교사 메켄지(W.J.Meckenzie)는 황해도 소래에 묻혀있고 남장로 출신 선교사들은 광주 양림동에 묻혀 있다. 스코필드박사(Dr F.W Schofield)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고, 호주 선교사들은 부산과 마산, 진주에 묻혀 있기도 하다.

존 W. 헤론 선교사는1858년 6월 15일 영국 더비셔(Derbyshire)에서 출생하여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Knoxville)로 이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교수로 내정된 분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직 소명 때문에 1884년 4월 24일 미국에서 조선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 E.Gibson)과 결혼하였다. 헤론 부부는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84년 4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조선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황제의 시의로서 가선대부 벼슬을 하여 혜참판이라 불렸다. 헤론은 1885년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하면서 매일 60~70명의 환자를 보았는데, 환자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였다. 병원이 개원된 후 1년 동안 제중원에서 모두10,460명의 환자가 치료받았다.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환자들이 몰려 들었다.

그의 업적은 우리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 번역사업을 비롯한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임위원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헤론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 정신과 사랑의 정신 그리고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하였다.

환자 진료에 있어서 그는 뛰어난 기술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백내장 수술은 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