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김범수 목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그리스 언어는 "테텔레스타이"인데, 시간적으로는 끝까지 도달했다, 일의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다 마쳤다는 의미가 있다. 마치 임금이나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며 만족스러운 성취감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지금 죄인의 형벌을 당하고 있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할 때 그 어느 누가 귀를 열고 들어 주었겠는가? 우습지 않는가? 정신이 온전하고 그런 말씀을 할 수 있겠는가?

로마시대에 죄인을 사형시키는 최악의 형벌이 십자가 형벌이다. 이미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달리는 자마다 저주받은 것이라고 했다. 죄인 중에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집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적으로 마지막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처럼 말했어야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정도의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50년 전에 로마의 정치가이고 군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로마 황실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썼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쉽게 읽을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말을 하며 성공적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다 치루었다"는 뜻이 담겨있다. "다 치루었다"는 것은 다 갚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속", "대속"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대속물'은 노예나 포로를 놓아 줄 때 지불하는 값을 말한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자동차나 집을 다 페이오프(PAY OFF)하지 않으면 타이틀(TITLE)이나 디드(DEED)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다 갚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누구나 다 이루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이루기 전에 무엇을 치루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기 전에 '다 치루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루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값이 있기 때문이다. 승리하고, 성공하려면 치루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이 빚이다. 시작이 없는 끝은 없고, 과정이 없는 결과는 없으며, 목적이 없는 목표도 없는 것이다. 빚을 다 갚기 전에는 다 치루었다고 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 자기만의 인생의 빚을 안고 살고 있다. 이것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고 한다. 성경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런 빚도 지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사랑의 빚을 다 갚으셨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진 죄의 빚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다 갚으셨다. 그것은 값은 죽음이고, 아픔이고, 고통이고, 치욕, 멸시, 천대, 외면, 비방, 손가락질, 비웃음, 매 맞음, 가난, 소동, 갇힘, 먹지 못함, 자지 못함, 수고로움 등 여러 가지를 다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짊어지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뒤돌아 가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 십자가를 돌격하고, 돌파하신 것이다. 내가 치루어야 할 나만의 빚을 다 갚지 않고서 인생을 잘산다고 말하는 것은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는 빚쟁이다. 부모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라와 사회에, 그리고 신앙인들은 하나님에게 빚진 사람들이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오늘도 사랑의 눈물과 수고의 땀과 노력의 피를 흘려야 한다. 이렇게 살아 갈 때 우리도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 치루었다!" 이런 사람이 다 이룬 인생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