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선교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구비 되어야 한다. 첫째는 선교지에 갈 선교사, 그리고 그 선교사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재정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람이나 단체이다. 한국 선교가 실현되기 위해서 후자의 일을 담당한 이들이 있다. 감리교회에는 가우처(John Goucher), 그리고 장로교회에는 맥윌리엄스(David McWilliams)이다.
조선은 밀려드는 해외 제국들의 세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이들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한다. 맨 처음 조약을 맺은 나라는 미국이다. 1882년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는다. 그 후 계속해서 그 외의 제국들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비로소 조선은 세계와 교류를 시작한다. 미국과 조약을 맺은 후 조선은 1883년, 미국에 사절단을 파송한다. 사절단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워싱톤을 향해 출발한다. 여행 중 콜로라도에서 한국 선교사상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메릴랜드(Maryland)주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가우처대학의 설립자이며, 미국 감리교회 목사로서 해외선교부의 출중한 지도자였던 가우처 박사였다. 3일 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가우처 박사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188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 본부에 한국에 선교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편지와 함께 선교 자금 2천 달러를 송금하였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회는 아직 한국에 선교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우처는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감리교 선교부 대표 메클레이(R.MacLay)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낸다. 편지에서 그는 “한국에 나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 후 선교 사업에 착수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메클레이는 이 편지를 받은 즉시 한국행을 결심하고 부인과 함께 1884년 6월 2주간 예정으로 한국으로 출발한다. 그는 전에 일본에 있을 때, 교제를 나누었고,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김옥균을 만난다. 그를 통해 한국에서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국왕에게 전하였다. 며칠 후 김옥균은 메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한국에서 병원 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회답을 받은 메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에게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 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귀환한 후, 그는 “우선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 사업은 시급한 요구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선교 본부에 보냈다. 선교본부는 메클레이의 편지를 받고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일본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도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선교 잡지「복음세계」(The Gospel in All Lands)에 투고하였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선교 헌금을 보내왔고, 가우처 박사가 보내 온 선교 헌금도 이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미국 북감리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의 첫발을 딛게 하였다. 1884년 말에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W.Scranton), 그의 모친인 스크랜톤(M.Scranton) 여사, 아펜젤러(H.Appenzeller) 목사가 한국의 첫 선교사들로 임명을 받고 내한하였다. 이로써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가 비롯되었다.
미국 감리교회가 한국 선교를 위한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 역시 한국의 선교 사업에 대한 작업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전술한 대로 이수정의 한국 선교에 대한 호소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선교본부위원들 간에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하였는데, 대체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과 즉시 시작해야 한다는 양분된 의견이었다. 미국 회중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는 한국 선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Ellinwood)는 한국 선교는 즉시 착수되어야 한다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한국 선교를 위해 예비해 두신 한 사람이 한국 선교에 대한 글을 읽고 선교 본부에 문의하였다. 그는 맥윌리엄스(D.McWilliams)라는 사람으로 뉴욕 브루클린에 소재한 라파이에트(Lafayette) 장로교회 교인이었다. 또한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부원이었으며, 마퀀드(F. Marquand)의 유산 관리인이었다. 그는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한국 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묻자, 엘린우드는 그에게 한국 선교의 시급성을 강조하였다. 맥윌리엄스는 그의 말을 듣고 만일 한국에 선교를 지금 시작한다면 선교사 두 명의 2년 간 생활비로 5,000달러를 내어 놓겠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목사님, 만일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판단에 따라 한국에 이 시점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고 합법적이라면 두 사람의 선교사 2년 간의 비용을 선교부에 지급하겠습니다. 지급하는 방법은 반 년에 한 번씩 선급하겠는데 그 합계 자급은 5,000불이 될 것입니다. 자금의 지불은 프레데릭 마퀀드(Frederick Marquand) 유산 중에서 될 터인데, 그 유지는 “교육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또는 국내, 해외에서 행해지는 선한 사업을 격려하고 돕는 일에 쓰여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 선교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선교 헌금을 보내와 선교 사역이 구체화됨으로써, 선교부는 1884년 봄에 한국의 첫 선교사로 “의술이 훌륭하고 헌신적 정신을 가진 젊은 의사” 헤론(John Heron)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선교부는 아직 한국의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고 바로 입국하는 것이 위험 부담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헤론으로 하여금 일단 일본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조치하였다. 헤론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맨 먼저 임명을 받고 일본에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1885년 6월에 입국하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 같이 선교에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필수적이라 했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해외 선교를 지원한다 해도 물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아무리 물적 자원이 많아도 지원자가 없으면 허사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필수 불가결의 요소이다. 감리교회 한국 선교는 가우처라는 분의 헌신적 노력과 당시 돈으로는 거금인 2천 달러를 희사함으로 선교가 가능했다. 장로교회 역시 맥윌리엄스가 5천 달러라는 거금을 희사하지 않았다면, 알렌이나, 언더우드의 한국행은 얼마나 지연되었을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헌신한 이들이 있어서 감리교회나, 장로교회의 선교가 조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 감리교회는 배제학당과 정동감리교회를 세운 아펜젤러나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렌톤뿐만 아니라, 이들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 가우쳐 박사를 기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장로교회 역시, 현재의 세브란스병원의 기초를 놓은 알렌 의사나,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뿐만 아니라 맥윌리엄스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헌금으로 한국 선교가 이른 시일에 가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