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누구냐는 한국 개신교회사에서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개신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개신교 시작의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수세자를 찾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한국 해안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때, 서양의 선진 기술문명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외지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이 만주와 일본에서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서로 매부, 처남 사이인 이 교회 소속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는 1872년에 중국 산동성에 도착하였다. 이 두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한국 개신교 선교에 혁혁한 공로를 남긴 이들이다. 이들은 그곳 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임지를 만주의 영구(營口)로 옮겼다.
로스는 이곳에서 모국인 영국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한국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소식은 로스로 하여금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만들었다. 1874년, 그는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평안북도 의주 건너편에 있는 고려문(高麗門, Korean Gate)을 방문했다. 고려문은 약 3천 명 정도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한국과 만주 사이의 교역 중심지였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인 상인 한 사람을 만나 한국에 관한 상황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를 통해 간단한 한국어를 익혔다. 이 사람이 한국인 최초 수세자 중 하나인 백홍준(白鴻俊)의 부친이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한국에 대한 전반적 지식을 습득 하였다. 또한 한국은 외국인의 입국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과 외국 종교에 대한 경계가 삼엄함을 파악하였다.
대강의 물정을 살피고 돌아온 로스는 1876년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이때 평안북도 의주에 사는 청년 이응찬(李應贊)을 만났다. 그는 홍삼장사 차 이곳에 왔다 로스와 그의 서기를 만난 것이다. 이응찬은 한국어 어학 선생이 되어 달라는 그들의 청을 받았다. 그는 이에 동의하고 영구로 가서 로스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의 고향 친구인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가 영구로 왔다. 그들은 매킨타이어와 그 곳 병원장의 어학 선생이 되었다.
이곳에서 네 청년들은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가깝게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한사코 기피하였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선 조정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를 극형에 처하는 무서운 법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접하는 선교사들과 복음의 능력은 그들로 하여금 마침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1876년, 그러니까 그들이 어학 선생으로 영구에 온 지 3년 만에, 신앙을 고백하고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최초 한국인 개신교 신자가 탄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한국 개신교의 시발이다. 이 일에 대해 로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매킨타이어는 네 명의 학식 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이 일 후, 같은 의주 청년인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장사를 하러 영구에 왔다. 그런데 서상륜은 그 곳에서 심한 열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이들을 만난 로스는 즉시 서상륜을 그곳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퇴원 후, 1879년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이 이곳에서 이룬 역사적 과업 가운데 하나는 한글 성경 번역을 도와 출판한 일이다. 로스는 한글 성경번역의 과업을 수행할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로스는 먼저 한글을 체계적으로 숙지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1877년에 한국어 입문서 (A Corean Primer)를 출판하였다. 이어, 그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 공부에 힘을 기울여, 1879년에는 한국의 고대와 근대 역사서(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를 출판하였다. 성경이 번역되기 전에 기독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기초 문서인 「예수셩교문답(聖敎問答)」과「예수셩교요령(聖敎要領)」이 1881년에 발간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개신교 문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일은 성경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 일뿐, 성경번역이 궁극적 목표였다. 어려운 여건에서 로스는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1882년 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한지(韓紙) 51쪽의 책자로 엮여 나왔다. 비록 쪽복음서였지만, 이는 반만 년 우리 역사에 우리글로 된 최초의 성경이며 또한 최초의 성경출판이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우리 민족이 쉬운 우리 글로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 3천부가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이 출판되던 해인 1882년에 한·미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한국에 미국공사관이 들어오고 한국과 미국의 교류시대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영적으로, 생명의 말씀에 우리 민족의 마음이 열리게 된 일이고, 육적으로는 세계에 우리의 문호를 활짝 연 단초가 된 일이다.
1884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출판되었으며, 계속해서 남은 성경들이 번역되었다. 드디어 1887년 신약 전체 번역이 완료되어 「예수셩교젼셔」 5천부가 심양의 문광셔원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성경번역이 시작된 지 10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아직 선교사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외지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출판된 일은 일찍이 세계 선교 역사에 거의 없는 기록적인 사건이다. 첫 개신교 수세자가 나오고, 첫 한글 번역 성경이 출판됨으로써, 이제 한국 개신교 역사는 그 장엄한 막을 올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특은이 아닐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