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유리 속에는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작은 인생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자동차의 앞 유리는 큰 통유리입니다. 전방의 모든 물체와 움직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도록 이음새 없이 하나의 큰 유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뒤를 보는 후사경은 조그마한 세 개의 거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 유리가 큰 통유리인 이유는 운전할 때 앞만 주목해서 보라는 뜻입니다. 교통사고의 가장 큰 이유는 앞을 잘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졸음운전을 하거나 딴전을 피우다가 대부분의 사고들이 발생합니다. 후방의 거울이 작은 이유는 후방 거울이 너무 커서 앞만 바라보아야 할 운전자가 자신의 관심과 시야를 뒤로 빼앗길까봐 입니다. 또 작은 후사경이 룸미러와 차 양쪽의 사이드미러로 나누어져 있는 이유는 조심해서 골고루 뒤를 바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차를 후진하거나 주정차 할 때, 한 면만 보지 말고, 항상 뒤를 좌우로 조심해서 살피라는 뜻입니다.
자동차는 본질적으로 앞을 향해 달리도록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운전 기술이 뛰어나서 아무리 후진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동차를 타는 이유는 앞으로 달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거나 주차를 할 때는 후사경으로 좌우 후방을 골고루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동차는 항상 “사각”(死角)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면 차 뒤에 있는 사람이나 물체를 놓치기 쉽습니다. 한쪽 방향만 아니라 여러 각도를 신중하게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뒤를 살피는 이유도 결국에는 앞으로 잘 달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 몸을 보더라도 눈, 코, 귀, 입이 모두 전방을 향해 달려 있습니다. 손도 발도 모두 앞으로 나아가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처럼 장점도 많았지만, 단점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살해한 오명을 평생 떠안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돕는 손길도 많았지만, 반대로 그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를 죽이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고 맹세하는 “결사대”들도 있었고, 교인들 중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사도됨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혔던 것은 치명적인 육신의 장애입니다. 바울은 그 고통을 “찌르는 가시”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 세 번이나 치유해 달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고후 12:8). 그러나 사도바울이 만약 자신의 지나간 부끄러운 과거와 장애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결코 우리가 아는 사도바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만 향해 달음질치려는 결단”(고전 9:26)에 있었습니다. 지나간 실수나 오류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정적인 기복을 뛰어넘어 앞으로 달릴 때만 바울과 베드로 같은 신앙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배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