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원 목사
(Photo : ) 서승원 목사

3.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관계

2)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

디아스포라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일 년에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이와 같은 본토에 대한 방문은 이스라엘 본토와 디아스포라 간의 차이를 해소시키는 데 상당히 기여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팔레스타인에 그 지부를 두고 있었는데, 이 소 공동체들은 본 공동체에서 본국을 방문하는 자들을 위해 숙소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본국에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설립한 셈이다. 이 본국의 소 디아스포라는 국외의 대 디아스포라와 본국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본국의 유대인들과 국외의 디아스포라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간에 큰 차이가 있었으리라고 상정하기 힘들다. 특히 종교적 관행과 사상에 있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유다이즘과 디아스포라의 유다이즘 간의 구별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위에서 소개된 데이비스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AD 1세기에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구별 자체가 매우 모호하다고 말한다.

헬레니스틱 시대에 있어서 소위 신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희랍식 교육을 받고 희랍어를 말하는 것은 상류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하나의 필수조건이었다. 희랍식 교육이란 희랍어로 된 희랍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희랍사상을 배우며, 종합체육관이라고 할 수 있는 김나지움에서 체육과 함께 희랍식 운동과 사교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언어는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 또는 그런 것들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언어의 기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문화적 체험이 담겨 있는 그릇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사상의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간접 또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한나라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그 언어를 사용한 민족의 사상과 관습을 배우게 된다.

헬레니스틱 시대에 유대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의 작품을 희랍어로 쓰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저자의 의도가 어떠하던 상관없이 그 작품 속에 희랍적 요소가 묻어들게 되고 또 독자들은 그것을 희랍적 사상의 틀 속에서 해석한다.

이것은 희랍어로 쓰인 신약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희랍어로 쓰인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희랍어가 당시의 공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희랍어가 복음의 깊은 뜻을 담는데 가장 적합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에 스토아 학파에 속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나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한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와 같은 로마인들이 그들의 철학적 저술을 라틴어가 아닌 희랍어로 기록한 사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희랍문화 특히 사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을 이해하는데 근동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지식이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쓰인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쓰인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통용된 사회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3)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다양성

그런데 헬레니즘과 그에 영향을 받은 유다이즘은 3세기 동안 내내 동일했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퍽 나이브(naive)한 생각일 것이다. 3세기 즉 300년은 상당히 긴 세월이다. 우선 헬레니즘의 경우를 보자. 고대 이집트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화 일반도 변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집트의 경우 특히 예술의 경우에 있어서 약 3천 년간 거의 변화가 없어 보이는데, 이것은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특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변화를 엄격하게 배제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규제된 예술 따라서 인위적인 예술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희랍예술은 크게 다르다. 희랍예술에서는 시대에 따른 뚜렷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아테네의 국립박물관을 방문해 본 사람은 예술에 있어서 비록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변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탄과 그리피스는 헬레니스틱 시대를 다음과 같이 두 국면으로 나누고 있다:

이 3 세기는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두 국면을 보여준다: 처음 국면은 과학, 철학, 문학, 정치형태와 그밖에 많은 점에 있어서 창조적이었고, 희랍-마케도니아 세계는 그 문명을 아시아에로 확대하였다; 나중 국면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창조적 충동과 서방에 대한 동방의 반작용의 고갈로 특징지어지고, 한편으로 희랍-마케도니아 세계는 로마가 궁극적으로 헬라적 국가제도를 파괴한 뒤에 결국 희랍문화의 기수의 임무를 떠맡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위에서 말한 반작용과 로마 사이에 붙잡혀 있었다.

이에 덧붙여 이 기간 중 동일한 시기에도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상반된 관습들과 사상들이 병존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은 철학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헬레니스틱 시대만 아니라 그 전 시대를 포함해서 고대희랍 전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헬레니즘을 인본주의 또는 개인주의 등 한마디로 특징지을 수 없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유다이즘에 대해서도 다소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유다이즘의 특색 중의 하나는 헬레니즘에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상이하고 또 상반된 여러가지 사상이 공존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요즈음의 학자들 중에는 단수형인 Judaism 대신에 복수형인 Judaisms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다양성은 비단 유다이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문화일반을 지칭하는 헬레니즘 자체의 특색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다이즘의 다양성은 헬레니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헬레니즘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성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반응이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헬레니즘은 단순히 희랍적 문화를 뜻하기보다는 보편주의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관습에 대한 적응 또는 포용을 뜻하기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