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당의 "비나이다"와 기독교의, "주시옵소서"의 차이가 무엇일까?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고 산다. 그 차이는.. 그분의 임재와, 우리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당은 "비나이다"로 통해, 원하던 것과 추구하던 것을 소유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아니다. "주시옵소서"를 통해.. 원하던 것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하던 것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시는 분과, 관계를 맺는 단계로 나아가며 그분으로 인해 피조물인 나 자신도, 그분을 닮아 가는 지경까지 성숙해 나아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시옵소서" 끝에 선한 목적이 없다면, 그 기도는 경건한 모습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무당적 행위에, 가까운 것일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단순히 소원성취가 아닌, 관계형성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점점 오늘날 기독교가, "비나이다" 쪽으로.. 세속화 되는듯 하여, 씁쓸하기 그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일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가장 값진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산제사로 드릴, 우리 자신일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혼과 육으로 가득하고, 인본주의로 가득한 옛사람이 아니라 고운 가루처럼 부서지고 변화된, 새사람 즉 자아가 죽은 "나"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것은 우리는 변화를 원하면서도, 정작 변화를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한 지금의 삶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산제물로,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 함으로 강력하게 저항한다. 이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역경, 고통, 반대, 짜증, 시련, 실패, 한계..라는 단어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자기와 같아서, 용광로 같은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변화되지 않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필요한 불을, 준비하신다. 마치 도자기의 용도와 크기에 따라, 가마를 준비하는 토기장이와 같이. 그리고 도자기는 결국 1500도라는 고열에서,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작품으로, 변화되고 거듭나게 되어 토기장이의, 기쁨과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자기가 화로에 들어가 있는 그 과정은, 사실 죽음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고, 변화 시키기 위해, 우리가 싫어하는 길로만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짜증 나는 일을, 만나게 하신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원치 않는 곳으로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몰로 가시기도 하신다. 그래야 깨지고, 꺽어지고, 드러나고, 항복하고, 변화되니까.
누가 지독한 환란과 역경외에 산제물 되는 길이 있다면 알려 주시라. 누가 혹독한 시련 당하지 않고서도, 변화되는 길이 있다면.. 알려 주시라. 그리고, 변화되지 않고서도 산제물 되지 않고서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선물이 되는 길이 있다면 알려 주시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셔서, 멋지고 근사한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불행함이나, 고통이 없는 안전하고 편안 삶을 허락 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인생도 없다.
M.스캇 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이란, 어려운 것이다. 그 사실을 일단 받아 들이고 나면, 삶이 어렵다는 사실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애[자기사랑, 자아중심]에 뿌리를 두고 "비나이다, 주시옵소서"를, 읖조리는 예수 무당 되지 말고 날마다.. 우리의 육신과 혼을 쳐서, 우리 자신을 산제물로 주께 드려,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님 중심의 영에 속한 성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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