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누구도 갈등 없이 살 순 없다. 100% 신이셨던 예수님께서도 한 인간으로서 갈등을 경험하며 사셨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함 투성이인 우리 인간이야 오죽할까? 잘 어울려 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발견하고 있다.
죄성을 가진 부족한 인간이기에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갈등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갈등에 잘 대처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갈등(葛藤)이란 말은 칡(葛)과 등(藤)나무 줄기에서 유래했다. 이 두 나무 줄기는 오르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칡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간다. 그런데 등나무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간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나무를 타고 오르면서 필연코 서로 만날 수밖에 없고, 서로 얽히고설키게 된다. 그래서 풀기가 힘들다.
인간도 서로 다르다. 아무리 비슷한 문화와 배경 속에서 자랐을지라도 서로 다르다. 아무리 성격이 비슷하다고 해도 서로 다르다. 그래서 갈등이 찾아온다. 원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갈등 없이 사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단, 하나! 조용히 숨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면 갈등은 사라진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죽고 못 사는 친한 관계일지라도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심지어 가까울수록, 접촉이 잦을수록, 갈등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갈등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갈등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산다. 갈등을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도망한다고 갈등 밖의 세계에 머물 수도 없다. 오히려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더 낫다. 그리고 갈등을 풀어가고자 함께 노력해야 한다.
어떤 부부는 심각한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수면 위로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더 파괴적인 갈등관계가 조장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이 없는 것처럼 서로를 속이며 안 그런 척하며 산다. 그렇지만 이게 해결 방법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갈등을 수면 위로 올려놓고 서로 갈등을 풀어가고자 애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갈등을 해결할 의지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아니 갈등을 더 깊어지게 만들려 애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누가 가장 큰 피해자인가? 갈등을 만드는 바로 그 당사자이다. 갈등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계 없이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해소하는 게 지혜롭다.
갈등을 쉽게 풀고 싶은가? 그렇다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원인은 자존심 때문이다. 알량한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자존심을 내세우는 원인은 무엇인가? 자기가 못난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제스처이다. 자존심을 지키려다 더 큰 것을 잃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짜 용기 있는 사람, 정말 멋진 사람은 먼저 '미안하다'고 손 내밀 줄 아는 사람이다. 먼저 손을 내밀고 사과하는 것은 절대 비굴한 것도, 치사한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미는가? 그렇다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손을 내밀어 주라. 갈등을 겪는 데는 일방적인 피해가 없다. 어느 정도 가해자이고, 동시에 피해자이다. 나만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처럼 갈등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만 가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피해자라고 생각할지라도, 나 역시 가해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갈등을 풀어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피곤하고 힘들다. 100% 옳은 게 어디 있겠는가?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다 이해할 수 있다. 의인 의식을 갖고 살던 맏형은 아버지에게 불평 불만을 털어놓았다. 동생을 이해하고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정죄하고 비난만 했다. 그러니 갈등이 해소될 리 없다.
상대방 입장을 조금만 이해하고 배려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서로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면 역지사지의 마음이 결핍되어 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자기밖에 모르니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자기 만족만 채우려 하니 상대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한 패턴이 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패턴이 있다. 너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 없다. 나만 이익을 챙기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니 갈등이 해소될 수 없다. 또다른 사람은 '나 죽고 너 살자'는 패턴이다. 갈등을 더 크게 확장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갈등은 해결될 수 있지만, 자신은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스타일이다. 둘 다 자폭하자는 식이다. 멱살잡이를 하며 막가는 극단적인 형태의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스타일이다.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상생과 공생의 길을 찾는 사람이다. 둘 다 유익을 누리자는 것이다.
개성공단을 둘러싸고 북한과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이제 마무리되는 듯해 너무 반갑다. 서로 손해를 덜 보고 상생의 길이 모색되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해결의 기미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정신으로 수고한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우리 정부도, 북한도 마지막까지 협상 테이블이 결렬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최근 어느 일간지에서 한 교회가 드리는 예배 광경 모습을 보았다. 한 무리는 본당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일부 교인들은 마당에 천막을 쳐 놓고 예배를 드렸다. 지금까지 오랜 아픔과 진통을 겪었지 않은가? 세상 법정에서 당할 만큼 부끄러움도 당했다. 고린도 교회처럼,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복음 자체는 아름답고 영광스럽다. 교회 자체는 영광스럽고 존귀하다. 그런데 온전치 못한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에 복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을 담고 있는 우리가 갈등을 풀지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은 십자가의 능력이 교회를 치유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직까지 갈등 없이 살기를 바라는가? 그럴 수는 없다. 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영화로운 상태가 되기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갈등을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지혜롭게 풀어가려는 의지를 갖고 살아가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가? 하나님은 갈등을 풀어가는 우리의 믿음을 보고 진짜 믿음을 확인하기 원하신다.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통해 영적인 성장과 성화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