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정인수 담임목사
(Photo : 기독일보)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정인수 담임목사

잠시 목회지를 떠나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한국에서 요즘 가장 많이 듣게 되는 화두는 ‘갑’‘을’ 관계라는 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약자는 ‘을’ 이며 그 약자를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쪽은 ‘갑’ 이다. 이렇게 갑과 을이라는 신분적인 용어를 써 가며 이 화두가 등장하게 된 동기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계속 일어나는 갑과 을의 파국적 관계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한 대기업 임원이 여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기내에서 라면 제공을 요구하는 한 대기업의 임원의 횡포로 인해 여승무원의 눈물이 흘려졌다. 또 중소기업 사장의 호텔 도어맨 폭행사건 등 사회지도층들의 도를 넘은 횡포에 서민들이 분노하였다. 아울러 대기업인 모 분유회사의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과의 통화에서 행한 폭언에 전 국민이 아연실색했다. 그 기업 회장까지 나서서 사과했지만 약자를 유린하고 억압하는 그 처사에 국민적인 공분을 연출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무수한 갑의 권력에 의한 폭력과 이를 말없이 감당해야 하는 약자 을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있다. 모든 사회 전반 분야에서 갑과 을의 관계성에서 오는 사회적 강자의 오만함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이 드러나고 있다. 마치 거대한 빙산의 덩어리의 충격과 공포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세상은 갑을 관계가 항상 존재한다. 갑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고 을은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수평적인 사회적 거래관계를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수직적이며 신분적인 관계로 잘못 해석하고 행동을 하거나 비열하게 남용하는 데 있다. 이로 인하여 을의 위치에 있는 자는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현실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참아야만 하며 심리적인 고통을 겪는 일이 일어난다.

소위로 말해 갑의 횡포, 을의 눈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주에도 한국의 가장 큰 일간 신문 기자들이 데모를 벌였다. 사주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편집 국장을 해고하고 신문 편집국을 폐쇄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을의 위치에 선 기자들이 갑의 위치의 사주로부터 일방적 해고를 통보 받았다.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합당한 이유도 없이 해고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약자와 가난한자와 소외된 자를 보살피고 보듬는 나라이다. 구약 성경에서 ‘과부’ ‘고아’ ‘가난한 자’는 늘 돌보고 배려할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자들을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 주셨다.

구약에서는 가장 가난하고 버려진 노예 출신 요셉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장 명예롭고 권세 있는 갑의 위치로 그 신분이 상승되는 은총이 그려지고 있다. 약소국의 노예 출신 다니엘도 바벨론에서의 갑으로의 신분이 바뀌어 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약자를 배려하고 약자의 인권을 세워 주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는 교회가 가장 앞장서서 당시 천민이었던 약자들을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로 세우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교회도 교권주의가 성행하여 교회의 새로운 갑과 을의 관계가 발생하고 있다. 힘이 없는 목회자, 교회들은 외면당하고 불이익을 당하기가 쉬운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이 세상의 질서와 흐름을 역류해야 한다. 교회는 앞장서서 가장 약한 자를 품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가치를 보여 주어야 한다. 약자의 권익을 중시하고 소외된 자들을 품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진원지가 되어야 한다.

을의 눈물을 수용하고 그 눈물을 씻어 주는 진정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