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교리 공부와 성경 공부를 하는데 삶의 변화가 없다.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삶의 모습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30일(토) 다니엘 기도원에서 열린 연합중보기도컨퍼런스에서 강사로 나선 이용규 선교사는 늘 해결 되지 않는 고민 앞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깊이 살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용규 선교사는 “야곱은 성경에서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복을 평생 찾아 산 사람이다. 야곱이 받으려고 하는 복과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의 차이가 있다. 인생 말년에 고백하는 것이 ‘험한 세월을 살았다’라고 고백한다. 여러분이 아는 복과 다른 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위해 예비하신 삶이 있었다. 야곱이 스스로 복을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삶이 꼬이게 됐다. 아버지 집에 살지 못하고 형 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됐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게 됐다. 여기가 야곱의 광야이다. 연단의 자리이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해결 되지 않은 근원적인 문제를 만지고 계신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의 모습이 거룩하게 보이지만 마음의 중심에 해결 되지 않은 부분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야곱의 얍복 나루의 천사와의 씨름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 마음을 제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며 마음을 다한 회개를 원하신다. 우리는 스스로가 문제를 볼 힘이 없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도우심으로 우리가 간구할 수 있다”고 권면했다.

다음은 이용규 선교사의 강의 전문.

우리가 힘들면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싶어 한다. 상대에게 이야기해서 정리가 되지 않으면 내면의 불편함, 분노가 생긴다. 내적 불편함이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열심히 교리 공부와 성경 공부를 하는데 삶의 변화가 없다.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교리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삶의 모습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신학교 도서관에서 나오다가 어떤 분과 식사를 하게 됐다. 신학 박사과정을 공부 하던 그 분 안에 건조함과 메마름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단 사역자를 따르게 된 것이다. 선한 분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 분의 말 가운데 날카로움이 있었다. ‘내려놓음 책을 읽어 봤는데 복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성경 밖에 안 본다고 말씀하시는 그 분에게 있어서 먼저 해결 되어야 될 어떤 근원적인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데 해결 되지 않는 어떤 부분 때문에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나눠 보면 좋겠다. 자기의(義)하고 자기애(愛)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나누고 싶다. 복음의 정수를 알았다고 이야기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 부분을 보기 원한다.

전도할 때 믿지 않는 사람과 논쟁하는 분이 있다. 논쟁에 지면 속상하고 영혼을 잃어버린 것 보다 내 말이 통하지 않는 속상함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근원적인 우리 안의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교리적인 불편함과 상처가 있다. 더 나아가 교회의 은사자들 안의 상처가 있다. 은사자가 사람으로 받은 불편함이 있다. 극단으로 갈 때가 있다. 한쪽으로 가거나 배회하고 방황 하는 경우이다. 은사적 측면 문제나 복음주의, 말씀중심, 어떤 원칙과 교리에 대한 불편함이나 그것에 대한 문제가 아닌 내 안의 문제가 교회 안의 영적인 어두움과 맞물렸을 때 슬럼프에 빠지고 좌절하는 정당한 이유로 제시 되는 때가 있다.

오늘 야곱 이야기를 보자. 야곱은 성경에서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복을 평생 찾아 산 사람이다. 야곱이 받으려고 하는 복과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의 차이가 있다. 한국 교회가 70, 80, 90년대 부흥을 이루면서 교인과 교회가 구했던 복과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는 복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분이 선호하는 복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만수무강, 오래 동안 사는 것을 말한다. 아프지 않고, 어려움 없이 편안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게 복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게 저주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하는 복이 무엇인가 점검해야 한다. 소위 ‘만사형통’이라고 한다. 찬송구절을 보면 ‘만사형통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번역이 우리 정서와 맞게 하기 위해 ‘만사형통’이라고 했다. 미국 가사로 보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원래의 가사의 의미가 그렇다. 그것이 만사형통. 만사형통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야곱이 복을 구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복이 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인생 말년에 고백하는 것이 ‘험한 세월’ 이라고 고백한다. 여러분이 아는 복과 다른 복을 받았다.

또 하나 야곱은 하나님의 복은 경쟁해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 믿었다. 에서와 끊임없이 경쟁하려고 했다. 한국교회가 80, 90년대에는 ‘복을 쟁취하는 야곱의 본 받아라. 복을 구하라’라고 가르쳤다. 야곱이 열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열심히 복을 구할 때 관계가 깨어졌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시려고 결정을 해 놓으셨다. 이삭의 기도로 리브가를 통해 아기가 생겼다. 처음부터 뱃속에서부터 경쟁하고 싸웠다. 이삭이 놀라서 하나님께 기도 했을 때, ‘네 태 중에 두 민족이 들어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 하셨다. 야곱을 위해 예비하신 삶이 있었다. 야곱이 스스로 복을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삶이 꼬이게 됐다. 아버지 집에 살지 못하고 형 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됐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최근 얼마나 젊은 사람들 사이에 기독교가 인기가 없어졌는지에 관해 들었다. 대학생들을 조사를 했는데 조사 결과, 크리스천 비율이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 3%로 떨어졌다. 몽골의 대학생 복음화률 보다 떨어진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 교회가 70, 80년대 뿌린 씨하고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을 통해서 확인 되냐면 아이들한테 무엇이 제일 중요하냐고 가르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제가 얼마 전에 제 아이들한테 물었다. ‘아빠는 너희가 어떤 때 제일 행복할 것 같니?’라고 물었다. 동현이가 첫 마디가 ‘우리가 공부 잘하면’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아차’ 했다. 평소 아이한테 하는 말이 투영된 것이다. ‘아, 이건 아닌데…’하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그것 때문에 만족하는 것처럼 비쳐졌다면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앞으로 신앙 안에 붙들려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더 나은 사람, 더 영향력 있는 성공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왔다. 실은 우리가 자녀들한테 그것을 강조했다. 그 결과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아이들은 내가 성공하려면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그것을 위해 주일 예배를 빠지고 공부하는 것을 정당화 시키게 되었다. 학교에서 일이 있으면 갔다 오라고 했을 때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그런 아이는 대학을 가서 교제할 때, 네트워킹 할 때 ‘교회가서 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안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한다. 대학을 가서 80%의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됐다. 성경은 ‘바보짓이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아이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 대학에서 신앙을 떠나는 가장 큰 요인이 부모님이 사회적 성공, 세상에서 성공이 중요하다고 믿고 살아 온 것이다. 삶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자라왔다. 부모 세대와 맞물려 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너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양보할 수 있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 좋은게 있어도 포기할 줄 알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알면서도 손해 보는 길을 가고 때로는 고난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앙이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면 아이들은 더 어려운 시기를 우리가 겪는 어려움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선교지에 가고 싶은 몇 가지 이유 중에 ‘아이들이 스마트폰 갖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아이가 좋은 환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에 있을 때보다 불평이 생기는 것이다. 상대적 비교 가운데 눌리면서 살게 된다.

야곱 안에 잘못 알아서 오해 된 부분, 이 부분 때문에 결국 쫓겨 가게 됐다. 자기 보다 힘센 형 에서를 피해서 자기 보다 더 약은 외삼촌 라반에게 간다. 여기가 야곱의 광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곳이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광야는 하나님 말씀을 대면하는 곳이다. 거기서 연단을 받는다. 야곱이 이제 내려온다. 자기 고향집으로 거기는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내려 온 길이다. 이 때 야곱의 신앙 수준을 볼 수 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 야곱의 신앙은 체험의 신앙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관해서 경험한 것이 많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야곱에게 해결 되지 않은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있다. 이제 야곱이 밑으로 내려 가다가 불안해졌다. 해결되지 않은 관계. 에서와의 관계 때문이다. 교회에서 가까이 하기 너무 먼 당신이 있다. 그 분을 통해 해결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늘 똑 같은 문제에 맞물리게 되어 있다. 왜 비슷한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것인가? 상처를 준 사람 보다 상처 받은 사람이 더 죄를 키우게 된다. 상처 받은 사람은 또 씹고 씹고 죄를 키우는 것이다. 그것이 심지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된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음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마옵시고’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용서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용서할 힘이 안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할 능력이 없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아버지와 똑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가? 아버지가 술을 먹고 때렸다고 하자, 내가 어느새 똑같이 아내를 때리고 미워하게 된다. 용서되지 않으면 그 영향력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된다. 자기가 잘못한 야곱은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야곱이 형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사신을 보냈다. 야곱이 보낸 사신이 ‘형이 4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당신에게 오고 있다’고 전했다. 야곱은 ‘나를 죽이려 오는 게 틀림없다’고 느꼈다. 평소 안 좋게 보이는 사람의 한마디가 전부 나를 찌르는 것 같이 들린다. 첫 번째 하는 일이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게 된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버릴 것과 못 버릴 것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그 다음에 비로소 기도를 했다. 야곱의 기도 자체는 정확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셨던 것을 상기 시켜 드린다. 두 번째로 ‘하나님 저한테 아버지 집으로 내려가라 하셨죠?’ 아버지 명령을 상기 시켜 드린 후 문제는 내가 지금 어렵다고 말한다. ‘형이 쳐들어오는데 죽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라는 바른 기도를 했다.

야곱은 기도가 끝나고 형 에서에게 보낼 선물을 싸서 보낸다. 단계적으로 하나 하나 1차 2차 3차에 걸쳐 보내고 있다. 지금 야곱이 어떤 상황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고 있다. 내 방식대로 안전장치를 하고 내 방식대로 보험을 드는 그런 모습이다. 현재 그 상황에서 야곱이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하나님이 건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을 잘 해석을 해야 한다. 선물을 보내 놓고 밤에 야곱이 일어나서 얍복강을 건넌다. 그리고 건넌 다음에 자기 혼자 강가에 있다. 힘들어 하는 야곱한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힘들다고 하는 야곱과 씨름을 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진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엉덩이 뼈, 다리 뼈를 쳤다는 것이다. 갑자기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나를 좀 도와 주세요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야곱이 짐을 새로 싸고, 우선순위를 정해 가족들과 강을 건너는 것은 야곱이 불안한 것을 말한다. 점점 우선순위가 줄어 들고 자기 자신만 홀로 남아 있다.

가장 이기적인 모습으로 야곱은 혼자 남아 있다. 야곱에게 해결되지 않은 근원적인 모습이 있었다. 무엇이 동기가 되는가? 그 근원에 누가 있는가? 야곱이 무슨 일이 있어도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그 행위 자체는 거룩하게 보이지만 마음의 중심에 해결 되지 않은 것 말씀하고 계신다.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과 씨름을 한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실제 다리를 절었다. 야곱은 여기서 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도망 갈거야 어디든 내가 불편한 것은 나는 감당 못해’라는 두 마음이 부딫힌다. 야곱은 지금 씨름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한 회개를 원하신다. 억지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 마음의 회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가능하다.

얍복 나루에서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다리 뼈를 치셨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인 다리는 생명이다. 사람이나 짐승이 이동할 수 없으면 그대로 안락사를 시킨다. 야곱은 두 다리만 있으면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야곱의 다리 뼈를 치신 것이다. 여러분의 다리 뼈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이것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다리 뼈이다. 내가 어렵게 해서 시민권을 취득하고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했다. 많은 경우 그것이 우리의 두 다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부분을 건드리실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하는가? 여러분 삶에서 무엇을 여러분의 안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가? 은행계좌? 무엇인가? 야곱이 그 부분을 건드리고 나니까. 하나님을 붙든다. ‘나를 축복하소서’라고 야곱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구한다.

전에는 하나님과 견제하고, 타협하려고 했고 거래 하려고 했다.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만을 붙들게 됐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 경쟁하는 자, 속이는 자였다. 삶의 근원, 그 중심에 가장 이기적인 모습의 내가 있었다. 야곱 자신이 삶의 근원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너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라고 말씀 하신다.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내가 그런 존재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포이다. 그 이름에 맞는 축복의 존재로 바꾸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를 바꿀 수가 없다.

야곱은 예전에는 형의 것을 받기 원했던 사람이었다.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이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아낌없이 주게 된다. 이 자리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여러분의 어려움이 해석되는 순간이다. 이후로는 에서가 야곱을 연단하는 도구로 역사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볼 힘이 없다. 그 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도우심으로 우리가 간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