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다음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떠한 곳인가.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과 고민은 나이가 들수록, 하늘로 돌아가는 시간이 가까올수록 더욱 짙어지고 절실해진다.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67)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그는 구약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확실한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확신시켰다. 그는 최근 한신구약학회 창립 강연회에서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란 주제로 강연을 진행, 참석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신대에서 43년간 구약학 교수로 봉직한 그는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구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한국 신학계에서 고난의 신학과 시편 신학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이 죽음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담의 범죄가 없었다면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수 있었는가. 이는 절대적으로 아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죽음은 타락 이전부터 피조물인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었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이 구절의 신학적 의의는 가히 놀랄 만하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에게 징계하시는 장면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저주를 받은 것은 ‘뱀’과 ‘땅’뿐이었다. 하와와 아담은 그들의 범죄의 결과로, ‘해산의 고통(하와)’과 ‘땀 흘리는 노동의 수고(아담)’란 징벌을 받게 되었으며, 그 징벌은 인간이 온 곳(땅의 먼지)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됐다.

‘먼지로 돌아간다’는 결코 죄의 결과로서의 표현이 아니다. 생명의 숨(breath of life)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을 주셨고(창1:27), 또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취하여 가시는 것이다(시90:3, 욥34:14~15, 전12:7).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본질, 그 자체가 무상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성서신학의 핵심 증언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롬5:12)’란 성경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 첫째는 먼지로부터 만들어진 인간이 그 본래의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의 전적인 비존재화, 전적인 소멸이다. 즉,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진정한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류가 끊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먼지로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은 두렵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 죽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삶의 한 단락에 불과하다.

- 우리가 다시 먼지로 돌아간 다음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또 삶이 있다. 이러한 전제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 후의 또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 준다. 구약성경은 ‘스올(죽은 자들의 세계)’이란 비유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한다. [편집자주: 스올은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름. 신약의 하데스에 해당하는 용어다. 이 단어가 ‘지옥’으로 번역됐을 때는 벌을 받는 장소에 대한 언급이고 ‘무덤’으로 번역됐을 때는 선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언급이다. 스올은 여러 문맥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가장 명백한 제시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타나 있다(욘2:2, 눅16:19∼31)].

죽은 후 인간의 몸은 비록 먼지로 돌아가지만, 그 몸의 모사(模寫)가 전적으로 소멸되지 않고 하나의 그늘(shade)인 ‘스올’로 옮겨간다. 스올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의 일부로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이다. 지상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없으며, 부활의 때(최후의 날)까지 기다리는 ‘임시의 장소’이다. 스올은 요한계시록의 ‘둘째 죽음’과 단연코 구분된다. 스올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영역 안에 있는 하나의 작은 점, 또는 작은 점과 같은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세계로 넘어가는 하나의 징검다리라고 보면 된다.

- 교회가 고백하는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시편 90편 1절은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주지(habitation)가 되셨나이다’라고 찬양한다. 죽음과 생명, 그리고 죽음 후의 삶 모두 창조주 하나님 야훼의 거주지 안에 있다. 이 거주지는 무한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에 이른다.

야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출3:12)’는 신실하고 확고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의 거주지 안에 머물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이 약속만이 죽음을 절대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탄생 전과 죽음 후에 존재하는 것은 허무가 아닌, 하나님이시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삶과 죽음, 죽음의 이후의 세계는 모두가 다 하나다.

-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편 16편 시인은 특별히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고 명료하다. 우선 시인은 2절에서 “당신은 나의 주님, 주님 이외에는 나의 행복은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최고 유일의 선(善)을 야훼라고 고백한다. 뒤이어 그는 다른 신의 존재와 다른 종교의 주술적 마술적 힘도 거부하는 유일신론적 신앙고백(4절)을 한다. 그 다음 야훼께서 함께 하시면 결단코 흔들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한다(8절). 이 때문에 그는 그의 마음,그의 내장,그의 몸에 기쁨이 가득 차 있음(9절)을 고백한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만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희망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5장 22~24절에 나타난 불사(不死)의 에녹이나 이사야 7장 14절, 그리고 열왕기상 2장 11~12절의 불사(不死)신앙이 모두 그러하듯, 전능자요 생사화복의 유일한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동행(임마누엘)은 죽음의 세력도 틈탈 수 없다는 것이 구약신앙의 중심 축이다.시편16편 8절의 신앙은 바로 이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야훼께서 항상 내 앞에 계시고 내 우편에 계시면 내가 요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분이 곧 음부와 무덤의 권세를 갖고 계신 유일하신 분이요, 생명의 길(11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생사화복은 단지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으로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신32:39, 삼상2:6).하나님은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시25:8, 호13:14, 고전15:54~55) 죽음이 궁극적인 슬픔과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