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복음이 만났다. 한성열 교수의 3일간의 특별집회 “나의 성격 이해 및 성숙해지는 법”의 결론은 복음이 주는 참 자유만이 인간을 성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삶이 성숙한 삶인가”부터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모든 심리학적 논의들은 결국 율법을 벗어 던져 버린 복음만이 인간에게 참 자유로 말미암은 성숙한 인생을 선물로 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욕구와 양심, 대인 관계와 현실의 관계성 속에 자리잡는다. 본능적인 욕구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인간이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반드시 현실이 존재하고 동시에 이 욕구를 제어하기 위한 양심이 발동하며 이런 과정 속에서 다른 인간과의 관계성이 형성된다.

인간이 가진 공격성을 예로 들면, 공격적 욕구는 인간의 자아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명령한다. 이런 명령을 받은 인간이 현실을 떠나 공격적 욕구를 발산하면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적 증세로 볼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대인 관계 속에서 공격성을 표출하면 이것은 일종의 범죄다. 두 가지 모두 분명히 성숙한 삶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강한 양심의 힘으로 이 공격성을 억누른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는 그렇지만 한 교수에 따르면 이것은 “심리적 억압 상태”일 뿐이지 결코 “성숙한 삶”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본능적 욕구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면서 신앙에 힘입어 거룩한 인격체로 사는 것이 성숙한 삶이 아니다?

한 교수는 바리새인들을 예로 들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예수님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자신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며 십일조를 드린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시대 바리새인들은 그런 삶을 살았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예수님이 그다지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들을 두고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비판하셨고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것은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금식할 때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보이게 하려 하라”고 강조하셨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이 바리새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인간이 가진 죄성과 악함을 두고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의롭다”는 우월 의식을 갖고 자신의 죄성을 감추기 위해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율법을 지킨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죄와 부족을 인정할 수 없었고 지속적인 심리적 억압을 통해 심리학적으로 불편한 삶, 미성숙한 삶을 산 것이다.

한 교수가 말하는 성숙한 삶은 인간의 자아가 처한 욕구, 현실, 대인 관계, 양심 중 어느 것 하나 무시하지 않고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공격성이 국민을 지키기 위해 나선 군인들에게 오히려 요구된다”는 말로 이것을 설명했다. 또 “복싱, 양궁, 사격, 펜싱 등 많은 스포츠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자신의 공격적 욕구를 어두운 밤에 남에게 가하는 것은 미성숙한 삶이지만 이것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스포츠의 형식으로 승화시키면 오히려 칭찬과 호응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성욕을 따라 음침한 곳에서 몰래 여성을 엿보면 범죄이지만 아름다운 그림이나 예술로서 보면 미학적 기쁨을 줄 수 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욕구를 현실적으로 해소함에 있어서 양심에도 거리낌이 없고 대인 관계도 긍정적으로 발전시켜 줄 수 있게 하는 방식이 바로 ‘문화’”라고 했다. 즉, 인간의 욕구가 문화의 옷을 입게 하는 것이 바로 성숙한 삶이다. 문화, culture는 cultivate에서 온 단어로 경작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 밭을 경작하면 문화가 된다. 인간이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차별적 공격성을 스포츠를 통해 해소하고, 성욕을 아름다운 방법으로 해소하는 등 마음의 경작이 필요하다. 욕구를 나쁘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 그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성숙해지는 법이란 결론이 난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바리새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심리적으로 억업했지만 창기나 세리들은 그 죄를 인정하고 오히려 주님을 만났다. 한 교수는 “자신이 죄 없다, 본능적 욕구가 없다 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죄성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럴 때에 온갖 가식과 위선을 던져 버리고 복음이 주는 참 자유 안에서 성숙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교수는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에 관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상처를 극복하게 되며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픔까지 웃으며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유머를 갖게 된다”고 부연 설명하기도 했다.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코 성숙한 삶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교수의 집회에 참석한 한 성도는 “인간의 심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복음적 통찰력으로 풀어낸 명강의였다”며 “율법과 은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새롭게 느껴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