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만큼 죽음과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은 드물것이다. 있다면 장의사(葬儀社) 정도가 아닐까? 목회 초년시절 한 가난한 할머니의 장례를 도맡아 하면서 염까지 해야 했던 일이 있다. 초짜 치고는 정말 담대하게 잘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몇 차례 더 死者의 눈을 감기고 팔과 다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면서 수의를 입히고 칠성판에 뉘이는 일들을 겁도 없이 했다. 지금도 그때 일들이 참으로 장하다.

미국만큼 장의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아들집에 와서 미국의 장례를 보신 선친께서 나도 미국에서 죽을란다! 하시고는 정말 이민오시고 버지니아의 하늘아래 묻히셨다. 워싱턴에 20년을 살면서 많은 분들의 장례를 집례도 하고 참석도 하면서 점점 더 순번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장수하는 시대에 태어난 행운아라 할지라도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임의로 할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만 105세를 사신 신후식 목사님께서 몇 주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인(故人)이 되셨다. 이 어른의 부고(訃告)를 받고 새삼 아! 이 어른도 가시는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목사로 죽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깊히 생각케 되었다. 그의 삶에 대한 공과(功過)는 차후 역사가들의 몫이겠지만 나에게는 그 분의 죽음이 목사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 주신 고마운 어른이다.

故 신 목사님은 젊잖은 분이셨다. 시대의 흐름은 목사라도 젊잖음을 버리게 한다. 어릿광대가 되어 체면이 말이 아니더라도 그저 성공만 하면 그만인 때에 그 분은 언제나 젊잖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분의 중도정신은 때로는 오해도 살만 한 것이지만 이타주의정신으로 본다면 참 모범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라도 상처를 주기 싫어하신 온유한 성품은 깐깐한 분들에게서 조차 인정을 받으신 분이다.

그 분은 애처가셨다, 백년해로 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일게다. 앞서 사모님을 보내시고 깊은 상심에 짝 잃은 기러기와 같은 몇 년을 보내시고 뒤 좇아 가셨다. 그 분은 언제나 새로움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시려고 애쓰신 분이시다. 세기를 달리하는 손자같은 목사들과도 언제나 대화가 가능하셨다. 늙으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쇠고집이 보통인데 이 어른과는 언제나 화통할수 있었다. 일테면 십분 설교 요청받으면 칠분정도 하시는 센스쟁이셨다. 워싱톤을 떠나 노스켈로라이나에 가셔서 말년을 보내신 까닭에 찾아뵙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분은 워싱턴 청소년 재단사에 기리 남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일만불이란 거금을 쾌척하신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가 인터뷰하면서 미국의 디아스포라 한인들에게 청소년들의 장래들을 부탁하신 귀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까닭이다.

목사가 된다는 것, 목사로 산다는 것도 심히 어려운 일이지만 목사로 죽는 다는 것은 제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목사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남겨지는 까닭이다. 아! 산전수전(山戰水戰) 故 이주원 목사님과 故 신후식 목사님 만큼만 살다 죽는다면 성공적인 목사의 일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