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 자주 사용되던 “졸부(猝富)”라는 단어가 있었다. 말 그대로 하자면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졸지에 큰 일을 당했다’라는 말을 할 때 그 ‘졸’자이다. 돈이 없다가 갑자기 돈이 생긴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괜히 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서 한 말인지도 모르나 그 이면에는 아마도 격상(格上)된 부자만큼 부자의 마음을 갖지 못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격상심하(格上心下)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일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다. 아버지 이새의 막내아들로서 형들의 틈에 끼여 제대로 목소리를 크게 내보지 못하고 궂은 일만 해야 했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형들이 해야 하는 양치는 일을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윗에게는 즐거운 일이었고, 보람된 일이었다. 비록 그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지라도 그는 행복했다. 그러던 그가 이웃 강대국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사건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격상(格上)의 신분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심하(心下)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그가 쓴 시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편131:1-2)
양치는 목동이 왕이 되는 삶은 성공한 삶이다. 사업적으로 보면 성장한 것이고, 영적으로는 부흥한 삶이다. 어린 아이가 늘 어린 아이로 있으면 슬픈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한다. 과거가 아름다운 것이지만 늘 과거를 먹고 살 수만 없는 것이다.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만큼 지금도 정말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술주정뱅이가 지금도 술주정뱅이고, 과거에 구두쇠가 지금도 구두쇠로 살고, 과거에 불 신앙인이 지금도 불신앙이라면 이것 참 슬픈 일이다. 격상(格上)이라는 말은 단지 신분이나 지위의 변화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격의 변화, 삶의 태도의 성숙을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관이나 인생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다윗같이 신분상승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격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다. 그 어떤 것도 노력이나 열심히 아니고서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가 서툴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그 자세도 격상을 이루는 한 예가 될 수 있다. 물론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축복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종의 자세를 갖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6:6-8)
내 친구 동기 목사가 같은 메릴랜드 지역에서 목회를 하는데 친구이면서 목회자로서 나는 그 친구를 존경한다. 그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고 늘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성실함이 그 교회를 성장하게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가 성도의 수가 적었을 때에도 많았을 때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마음으로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그 자세는 목회자로서 배워야 할 모습이다. 그가 심하(心下)의 태도를 갖고 있다고 칭찬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 분은 왕의 신분을 자랑하거나 그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람들 위에 지극히 높여 모든 사람의 입으로 주라 시인하게 하셨던 것이다.
공자의 논어 ‘학이시습편“에 보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군자답지 아니한가(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는 말이 있다. 심하(心下)는 어떤 일에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이다. 자랑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싸우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자고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남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다.
격상심하(格上心下), 이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다. 그렇다면 또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구약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다. 아버지 이새의 막내아들로서 형들의 틈에 끼여 제대로 목소리를 크게 내보지 못하고 궂은 일만 해야 했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형들이 해야 하는 양치는 일을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윗에게는 즐거운 일이었고, 보람된 일이었다. 비록 그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지라도 그는 행복했다. 그러던 그가 이웃 강대국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사건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격상(格上)의 신분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심하(心下)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그가 쓴 시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편131:1-2)
양치는 목동이 왕이 되는 삶은 성공한 삶이다. 사업적으로 보면 성장한 것이고, 영적으로는 부흥한 삶이다. 어린 아이가 늘 어린 아이로 있으면 슬픈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한다. 과거가 아름다운 것이지만 늘 과거를 먹고 살 수만 없는 것이다.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만큼 지금도 정말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술주정뱅이가 지금도 술주정뱅이고, 과거에 구두쇠가 지금도 구두쇠로 살고, 과거에 불 신앙인이 지금도 불신앙이라면 이것 참 슬픈 일이다. 격상(格上)이라는 말은 단지 신분이나 지위의 변화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격의 변화, 삶의 태도의 성숙을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관이나 인생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다윗같이 신분상승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격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다. 그 어떤 것도 노력이나 열심히 아니고서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가 서툴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그 자세도 격상을 이루는 한 예가 될 수 있다. 물론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축복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종의 자세를 갖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6:6-8)
내 친구 동기 목사가 같은 메릴랜드 지역에서 목회를 하는데 친구이면서 목회자로서 나는 그 친구를 존경한다. 그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고 늘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성실함이 그 교회를 성장하게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가 성도의 수가 적었을 때에도 많았을 때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마음으로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그 자세는 목회자로서 배워야 할 모습이다. 그가 심하(心下)의 태도를 갖고 있다고 칭찬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 분은 왕의 신분을 자랑하거나 그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람들 위에 지극히 높여 모든 사람의 입으로 주라 시인하게 하셨던 것이다.
공자의 논어 ‘학이시습편“에 보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군자답지 아니한가(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는 말이 있다. 심하(心下)는 어떤 일에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이다. 자랑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싸우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자고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남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다.
격상심하(格上心下), 이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다. 그렇다면 또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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