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세탁기를 참 좋아해서요. 어디 가도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면 그렇게 반갑고……”

결국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학생이면 좋아할 것도 많고 좋아할 수 있는 것도 많은데 그녀는 세탁기를 좋아한단다. 가전제품 전문 매장에 가도 친구들이 좋아하는 랩탑 컴퓨터나 디지털 카메라, 셀폰을 보러 가기보다 세탁기를 보러 간다. 세탁기 소리에 아버지, 어머니의 냄새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북텍사스주립대에서 바이올린 전공으로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는 평신도로서 현재 중국 위구르 선교사다. 그녀의 부모가 소명을 받아 중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녀가 주말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 올 때면 손에 가득히 들고 간 빨래를 아버지가 직접 세탁해 주셨다. 그녀는 아버지가 해 주는 세탁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선교지로 떠난 이후, 그녀는 주말이나 방학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됐다. 외로울 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가 선교하는 위구르에 최근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통신과 연락이 두절됐을 때는 온갖 걱정과 두려움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심장에 병을 갖고 있어 7년마다 심장의 박동을 조절해 주는 기계의 배터리를 교체해 주어야 하는 상황. 그런 몸으로 선교를 나간 부모에게 “공부하기 힘들어요”라는, 모든 대학생들이 한번쯤은 해 볼 수 있는 흔한 말조차 그녀는 감히 건넬 엄두가 안났다. 학비도 스스로 벌어서 조달하고 있는 상황에, 현재 졸업을 앞두고 퀸즈칼리지 음대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아 입학을 뒤로 미룬 상황이다.

시카고나무교회가 김예본 양을 7월 29일 서프라이징 콘서트의 게스트로 초청했다. 김 양의 연주를 함께 나누면서 그녀를 격려하고 콘서트의 수익금을 장학금으로 전달하려는 취지였다. 경쾌한 찬양으로 시작된 콘서트 중 김정한 담임목사가 김 양의 독주 시간을 소개하며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녀는 결국 세탁기 소리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이올린 전공자답게 각종 찬송가 연주와 타이스의 명상곡 등 클래식 곡들을 수준 높게 소화해 낸 연주에 청중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녀의 연주 스타일을 굳이 묘사하라면 여성 연주자들이 가진 부드러움과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남성 연주자들이 가진 강한 활의 움직임과 묵직한 소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20대라면 어리다면 어린 나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기대기는커녕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스스로 홀로 서야만 했던 그녀가 선교사 자녀로서 뿜어낼 수 밖에 없는 작은 십자가의 흔적이었을까?

짧은 간증 후에도 울음을 잘 참으며 연주하던 그녀가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을 연주하며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곡과 그녀의 눈물 소리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선교지에서 태어나 문화 갈등을 겪는 선교사 자녀들, 추방과 박해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자녀들, 부모가 선교지로 떠난 후 혼자 남아 학업을 하는 자녀들, 상황은 각자 다를지라도 이 시대 모든 선교사 자녀들이 김예본 양이 들려준 눈물같은 연주를 살아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