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한국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눈도 잃고 거지생활을 전전하던 그가 목사가 되고 병원장이 되어 그덕에 3만명이 넘는 시각장애우가 개안수술을 받았고 40만명이 무료 진료를 받았다.

그가 9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밖에 나가서 놀다 와 보니 집이 폭격돼 부모는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아가 된 아이는 남의 밭의 과일을 서리해 먹다 이번에는 수류탄이 터져 양눈을 잃었다. 함께 있던 친구 8명은 모조리 죽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생은 모질었다.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다 친척의 집으로 갔지만 매맞고 욕먹는 게 일이었다. 수십번도 자살을 결심했지만 그때마다 “죽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결국 친척의 집에서도 도망 나온 그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보통 거지는 아니었다. 거지 생활 중 만난 할머니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가게 됐다. 앞을 못본다고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음식이나 돈을 주면 그것을 꼭 다른 거지들과 나누었다. 그리고 동냥받은 돈이라도 십일조를 하는 그런 거지였다. 주일에 교회에 갔다가 거지라고 쫓겨나면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그 열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군의 도움으로 학교에 입학할 길이 열렸고 점자를 공부할 수 있었지만 당시 시각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전국을 돌며 안마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러다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당시의 대표적인 기독 사학인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숭실고, 숭실대까지 진학했고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 목사가 됐다. 나중에는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는 1972년 시각장애우를 위한 교회를 세워 점자성경과 점자찬송을 보급했으며 1986년 실로암안과병원을 개원하며 시각장애우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진료는 무료이고 개안수술은 3분의 1 가격이다. 모자라는 돈은 김 목사가 직접 전국을 다니며 메시지를 전하고 모금해 충당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던 김 목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필리핀 정부가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 덕이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 상은 장애우 사역에 헌신한 공을 인정해 필리핀 정부가 직접 김 목사에게 수여했다.

그는 오늘도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우를 돕고 그들에게 빛과 소망을 전해 주기 위해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2일 복음장로교회와 7일 휄로쉽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으며 5월 9일 참길장로교회 주일예배, 14일 시카고연합장로교회 금요예배, 16일 순복음시카고교회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