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로 도피한 깔뱅은 자신의 라틴어식 이름 칼비누스(Calvinus)의 철자를 바꿔 루시아누스(Lucian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불어권 개혁 신자를 위한 교리서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1535년 8월에 탈고한 기독교 강요를 1536년 3월에 출판한 후, 성경과 마틴 루터, 필립 멜랑흐톤과 마틴 부쳐의 책들을 더 공부하기를 원하였다.

이런 학구적인 자세 때문에,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에 깔뱅은 ‘심령을 움직일 수 있는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기 위하여 엉굴렘 출신 친구 루이 뒤 띠예와 함께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로 가기도 하였다.
▲깔뱅은 본인이 알고자 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바젤에서 페라라까지 600Km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방문하는 학문적 열정을 보였다.

그곳에서 수 주간 머물면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딸이며 프랑수와 1세의 친척으로, 망명 중인 흐나타(Renata) 공작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개혁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르페브르의 제자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깔뱅이 네락에 갔을 때 르페브르를 통해 소개받은 듯하다.

깔뱅은 또한 프랑스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훗날 쥬네브(제네바)에서 함께 사역하며 시편 찬송을 만드는 시인 클레망 마로(Clément Marot)도 있었다.

바젤로 돌아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후, 잠깐의 종교 완화정책으로 깔뱅은 4월에 파리로 가서 자신의 형제 자매와 친구들을 상봉한다. 6월에는 고향 느와용으로 가서 사제직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반납한다. 그리고 프랑스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종교적 압박을 예상한 깔뱅은, 동생들인 앙뚜완과 마리와 함께 곧바로 마틴 부쳐와 다른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프랑수와 1세와 황제 샤를르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리용(Lyon)을 거쳐 쥬네브(제네바)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의 동참하기보다 학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깔뱅에게 저주까지 하면서 깔뱅을 설득하고 있는 파렐.

이곳 쥬네브에서 파렐과 깔뱅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깔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가기를 원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빠른 길은 전쟁으로 인해 막혀 있었다. 할 수 없이 쥬네브에서 하룻밤만 머물고 떠나기로 생각을 했었다. 당시 쥬네브는 파렐과 예술의 대가인 삐에르 비레(Pierre Viret)에 의해 교황에 의한 제도들은 모두 폐지되긴 했지만 시민들 사이에 위험한 분열의 불씨와 많은 투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음 증거에 사력을 다하고 있던 파렐은 나를 그곳에 머무르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곳에 머물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런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안정된 삶과 나의 연구들을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깔뱅은 결국 쥬네브에 남아 파렐 그리고 친구 삐에르 비헤(Pierre Viret)와 함께 사역하지만, 2년이 채 못 된 어느날 새로운 시의회가 깔뱅과 파렐에게 1538년 부활절 주일 설교를 금지하며 3일 내로 도시를 떠날 것을 명령하므로,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을 섬겼다면 우리는 정말 잘못된 대우를 받은 것이지만,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겼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보답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깔뱅은 파렐과 친구 비레와 2년간의 사역을 정리하여 떠나게 된다.

파렐은 뉴사텔로 돌아가 7월에 그곳 교회에서 임직을 받는다(아마도 담임목사일 듯). 이런 사건 후 깔뱅의 친구들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완고함을 지적하는데, 깔뱅은 자신의 고집과 잘못된 방법들에 대하여 깨닫고 수용한다. 그리고 그는 공적인 활동들을 중단하고, 학자로서 조용한 삶을 살기 위해 바젤로 돌아갈 계획을 갖고 있었기에, 목회자 없이 모임을 갖고 있던 프랑스 난민들을 위한 교회 목사로서 스트라스부르에 오랫동안 머물러 달라는 제안에 대하여 거부하였다. 하지만 마틴 부쳐(Martin Bucer)와 볼프강 까삐또(Wolfgang Capito)의 계속되는 설득으로 결국 생각을 바꾸고, 9월부터 쥬네브로 돌아가기까지 3년 동안 난민 위그노 교회 목회자로 사역한다.

깔뱅이 머물기 시작한 1538년 경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개신교회의 아주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나, 당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자치특권을 누리는 자유도시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로 인해 피신 온 많은 위그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스트라스부르에서 가장 예쁜 거리로 관광 명소인 쁘디 프랑스(Petite France)를 형성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박해로 인해 피난 온 프랑스인들에 의해 형성된 ‘작은 프랑스’라는 의미인 쁘띠 프랑스(Petite France)의 모습.

깔뱅이 목회했던 난민 위그노 교회는 깔뱅이 머물렀던 참사원의 집 바로 옆인 4, rue du Bouclier에 위치하고 있다. ‘방패’라는 의미인 부클리에(Bouclier) 교회당 건물은 깔뱅 당시의 것이 아닌, 그 후예들이 새로 건축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한 신학생이 잘못 올린 정보로 인해, 많은 분들이 슈바이쳐 목사가 목회했던 성 니꼴라 교회를 깔뱅이 목회했던 교회로 오해하고 그곳만 방문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깔뱅은 1531년부터 성 토마스 교회를 목회하던 마틴 부쳐 목사의 사택(3, rue Salzmann, 당시는 rue des Chevaux )에서 함께 기거를 하다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성 도마 교회 참사회원의 집 (2, rue du Bouclier)으로 이사를 한다. 이 집은 매우 컸기에 많은 사람들과 방문객들이 함께 머물게 되며, 머무는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숱한 일화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깔뱅이 쥬네브로 떠난 후 1563년 8월 19일 교구는 없어지고, 신학적 문제와 개인적 이유로 교회는 해체되고 만다. 그리고 1585년까지 개인 가정에서 모임을 비밀히 가져 오다가, 1588년에는 시에서 모임을 금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