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인이 양화진에 묻혀 있을까. 그가 이곳에 묻혀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유일하게 일본인으로서 양화진에 안장된 주인공은 바로 소다 가이찌(曾田 嘉伊智, 이하 소다)이다.
그는 1867년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縣)에서 출생하였다. 오까야미시(岡山市)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일찍 개항된 나가사끼(長崎)에 갔다. 우선 돈이 필요해 탄광에서 일하면서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교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5세가 되었을 땐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 도착하고 영어를 배웠다. 때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대만은 일본 식민지가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면서 독일어도 공부하게 되었다.
대만에 거주할 때는 몹시도 방탕하게 생활하였으며, 1899년 술을 먹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조선 청년이 업고 가까운 여관에 데려가 여관비까지 지불하고 묵게 해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05년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 서울에 정착하면서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여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는 그곳에서 종교부 총무 이상재를 만났으며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소다 가이찌는 이 무렵 일본인 우에노를 만나 얼마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우에노는 진실한 기독교 교인이며, 일본인 초등학교인 히노데소학교(후 일신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 있었으며,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소다는 새로운 인생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소다의 서울에서 강연 잘하기로 장안에 소문이 났으며 그 인기는 참으로 높았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교회의 초청도 받았으며, 강연할 때 자신의 방탕했던 생활부터 대만에서 조선인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야기도 하면서 그의 신앙은 더욱 성장해갔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뜻하지 않게 한일병탄의 소식을 접한 소다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노하고 105인 사건을 조작했던 데라우찌(寺內穀) 총독에게 “죄 없는 조선 사람을 즉시 석방하라”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인 경성기독교회(해방 후 덕수교회로 변경) 장로인 대법원장 와다나베(渡邊暢)를 찾아가 석방시키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본인 사회에서 배신자란 말도 들었으며, 조선인으로부터는 일본인 스파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조선인과 조선 교회를 아끼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신앙생활 또한 열심히 하였다. 이것이 일본 교계에 널리 알려지자 서울 중구 회현동에 일본인 메도디스트교회(해방 후 남산교회로 변경, 현재는 강남 반포 쪽으로 이전)가 설립되었고 그는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이 무렵 일본인 교회들이 서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교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1921년 뜻하지 않은 책임이 일본으로부터 그에게 부여되었다. 고아사업기관인 일본 가마꾸라(鎌倉)본부로부터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을 받은 것이다. 용산구 후암동에 자리잡은 가마꾸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부부는 정성을 다해 조선인 고아들을 돌보았다. 당시 조선은 가난하여 아이들을 많이 출산하였지만 기를 능력이 없어 또한 많이 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은 언제나 이들의 몫이 되었다. 이들 부부는 열심히 고아들을 돌보기도 하면서 함께 생활하였다. 이 일 때문에 “소다는 하늘의 할아버지, 우에노는 하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얻기도 하였다.
1943년 원산의 일본인 교회 교역자가 없자 소다 전도사가 무보수로 사역했다. 그의 부인은 충무로에 있는 일신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잇었기에 가마꾸라보육원도 역시 부인의 몫이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조선이 해방을 맞았다. 이때 서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대한만세”를 부르면서 밤이 맞도록 시가 행진을 했었으며, 다시 교회마다 없어졌던 새벽기도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해방이 되자 이미 미국과 소련이 약속했던대로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을 하였으며,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국이 차지하였다. 이처럼 미소 양국에 의해서 원산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는데 이들의 횡포가 심하자 일본인들이 모두 원산 일본인교회로 임시 대피하였다.
그러다 1947년 소다는 일본인들을 인솔하여 월남하였다. 가마꾸라보육원에서 우에노 부인을 만나 얼마 동안 함께 지내다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신일본을 건설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귀국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오 하나님, 인류가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다녔다.
그의 부인은 고아들을 돌보아야 했으므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다가 1950년 1월 74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달려왔던 소다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그를 치료했던 세브란스병원 원장 김명선 박사 등 여러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소다는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었다고 한다. 우에노 여사의 장례식은 한국사회사업연합회가 주관하여 엄숙히 거행하였다. 장례식을 마친 후 소다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일본인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 1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 씨의 옛 친구 소다 옹이 한국 귀환을 열망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대서특필하였다. 이 기사가 한국 신문에 특보로 소개되자 영락보린원 원장 한경직 목사는 소다가 제2의 고향인 한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정부 당국과 교섭했다. 그 결과 소다는 1961년 3월 한경직 목사의 환영을 받으면서 아사히신문사의 특별기편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양화진에 묻힌 소다 가이찌(曾田 嘉伊智, 이하 소다)의 묘. |
그는 1867년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縣)에서 출생하였다. 오까야미시(岡山市)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일찍 개항된 나가사끼(長崎)에 갔다. 우선 돈이 필요해 탄광에서 일하면서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교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5세가 되었을 땐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 도착하고 영어를 배웠다. 때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대만은 일본 식민지가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면서 독일어도 공부하게 되었다.
대만에 거주할 때는 몹시도 방탕하게 생활하였으며, 1899년 술을 먹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조선 청년이 업고 가까운 여관에 데려가 여관비까지 지불하고 묵게 해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05년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 서울에 정착하면서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여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는 그곳에서 종교부 총무 이상재를 만났으며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소다 가이찌는 이 무렵 일본인 우에노를 만나 얼마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우에노는 진실한 기독교 교인이며, 일본인 초등학교인 히노데소학교(후 일신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 있었으며,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소다는 새로운 인생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소다의 서울에서 강연 잘하기로 장안에 소문이 났으며 그 인기는 참으로 높았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교회의 초청도 받았으며, 강연할 때 자신의 방탕했던 생활부터 대만에서 조선인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야기도 하면서 그의 신앙은 더욱 성장해갔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뜻하지 않게 한일병탄의 소식을 접한 소다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노하고 105인 사건을 조작했던 데라우찌(寺內穀) 총독에게 “죄 없는 조선 사람을 즉시 석방하라”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인 경성기독교회(해방 후 덕수교회로 변경) 장로인 대법원장 와다나베(渡邊暢)를 찾아가 석방시키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본인 사회에서 배신자란 말도 들었으며, 조선인으로부터는 일본인 스파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조선인과 조선 교회를 아끼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신앙생활 또한 열심히 하였다. 이것이 일본 교계에 널리 알려지자 서울 중구 회현동에 일본인 메도디스트교회(해방 후 남산교회로 변경, 현재는 강남 반포 쪽으로 이전)가 설립되었고 그는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이 무렵 일본인 교회들이 서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교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1921년 뜻하지 않은 책임이 일본으로부터 그에게 부여되었다. 고아사업기관인 일본 가마꾸라(鎌倉)본부로부터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을 받은 것이다. 용산구 후암동에 자리잡은 가마꾸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부부는 정성을 다해 조선인 고아들을 돌보았다. 당시 조선은 가난하여 아이들을 많이 출산하였지만 기를 능력이 없어 또한 많이 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은 언제나 이들의 몫이 되었다. 이들 부부는 열심히 고아들을 돌보기도 하면서 함께 생활하였다. 이 일 때문에 “소다는 하늘의 할아버지, 우에노는 하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얻기도 하였다.
1943년 원산의 일본인 교회 교역자가 없자 소다 전도사가 무보수로 사역했다. 그의 부인은 충무로에 있는 일신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잇었기에 가마꾸라보육원도 역시 부인의 몫이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조선이 해방을 맞았다. 이때 서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대한만세”를 부르면서 밤이 맞도록 시가 행진을 했었으며, 다시 교회마다 없어졌던 새벽기도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해방이 되자 이미 미국과 소련이 약속했던대로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을 하였으며,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국이 차지하였다. 이처럼 미소 양국에 의해서 원산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는데 이들의 횡포가 심하자 일본인들이 모두 원산 일본인교회로 임시 대피하였다.
그러다 1947년 소다는 일본인들을 인솔하여 월남하였다. 가마꾸라보육원에서 우에노 부인을 만나 얼마 동안 함께 지내다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신일본을 건설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귀국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오 하나님, 인류가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다녔다.
그의 부인은 고아들을 돌보아야 했으므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다가 1950년 1월 74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달려왔던 소다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그를 치료했던 세브란스병원 원장 김명선 박사 등 여러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소다는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었다고 한다. 우에노 여사의 장례식은 한국사회사업연합회가 주관하여 엄숙히 거행하였다. 장례식을 마친 후 소다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일본인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 1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 씨의 옛 친구 소다 옹이 한국 귀환을 열망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대서특필하였다. 이 기사가 한국 신문에 특보로 소개되자 영락보린원 원장 한경직 목사는 소다가 제2의 고향인 한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정부 당국과 교섭했다. 그 결과 소다는 1961년 3월 한경직 목사의 환영을 받으면서 아사히신문사의 특별기편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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