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여학교 초대 교장 엘러스(A. Ellers) 선교사와 4대 교장 메리 해인드 기퍼드(M. H. Gifford, 기보부인) 선교사는 양화진에 묻혀 있으며, 2대 교장인 헤이든(M. Haydon) 선교사는 잠시 시무를 하다가 귀국했다. 3대 교장인 도티(S. S. Doty) 선교사는 정동에서 연동으로 학교를 이전하고 정신여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착을 하였다. 그는 청주 선교부에 있는 밀러(F. S. Miller) 선교사와 결혼을 하여 청주에서 선교사로 사역을 하다가 1931년에 삶을 마감하였으며, 그의 묘비는 청주에 있다.
정신여학교 설립자인 엘러스 선교사는 1860년 미국 장로교 목사의 딸로 출생을 하였으며, 1881년 일리노이주에 있는 록포드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조선에서 광혜원을 설립하고 의료 활동을 하고 있던 알렌 의료선교사의 간절한 요청의 서신을 받고 페르시아에서 조선으로 선교지를 바꾸었다.
이 때 알렌은 의사의 자격증이 있으면 좋겠다고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받았던 엘러스는 보스턴의과대학에 진학을 하여 의술을 연마하였다. 의료선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춘 그는 1866년 벙커 선교사와 함께 조선 조정에서 운영하는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사역할 길무어(G. W, Gilmore, 길모), 헐버트(H. B. Hulbert), 벙커 등 선교사와 함께 한양에 도착하였다. 엘러스 의료선교사는 알렌이 책임자로 있는 광혜원에서 여성을 상대로 하는 의사가 됐다. 그녀가 한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민비가 병에 걸려 몹시 앓고 있었다.
알렌 선교사가 몇 차례 갔지만 민비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진료를 할 수가 없어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다행히 여자 의사인 엘러스가 광혜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연락하여 창덕궁에 머물고 있는 민비를 진료케 하였다. 엘러스는 민비의 병세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었으며, 알맞은 처방이 이루어지자 민비의 병은 곧 회복되었다. 그 후 엘러스 선교사는 민비와 궁궐로부터 신임을 받고 민비의 주치의가 되었다.
엘러스 선교사는 1886년에 내한하여 정동에서 생활을 하다가 1887년 6월에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한 명의 고아를 데리고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소문이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지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엘러스 선교사는 1888년 벙커(D. A. Bunker, 방거) 선교사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엘러스 선교사와 벙커 선교사는 부부 선교사가 되었다. 정동여학당은 1년이 지나자 학생이 많아졌으며, 1888년에는 헤이든(M. Haydon) 선교사가 2대 교장으로 잠시 재직하였다. 1890년에 도티(S. S. Doty) 선교사가 3대 교장으로 취임을 하면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종로5가 쪽에 있는 연지동에 자리를 잡고 정신여학교(현 정신여자 중고등학교)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할 수 있도록 기여했던 독지가 세브란스는 또다시 정신여학교를 신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관이라 부르게 됐으며, 현재 그 건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 벙커 선교사가 1894년 배재학당 부학당장으로 옮겨 가면서 장로교 선교사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신분이 변경되었다. 이 일로 엘러스도 감리교 선교사로 교파를 바꾸었다. 엘러스는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육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더욱이 정신여학당 출신이며 엘러스 교장의 지도 하에 교육을 잘 받았던 이들은 모두 YWCA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엘러스는 미국에 연락하여 조선 YWCA 설립을 위한 기금 5천엔(圓)을 희사받은 일도 있었다. 1926년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하였다가 1932년 남편이 사망하자 1937년 재차 입국하여 황해도 소래에 잠시 있다가, 1938년 서울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삶을 마감하자 선교부에서는 남편과 함께 양화진에 잠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88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한 기퍼드(D. L. Gifford, 기보) 선교사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낮선 이국땅인 서울에 도착하였다. 기퍼드 선교사는 조금도 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고 언더우드의 좋은 협력자로서 새문안교회를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당시에 언더우드는 선교구역이 서울로 제한받지 않고 황해도 소래지역과 평안도 의주지방을 자주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더욱이 평안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을 건너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설립했던 새문안교회를 비워 둘 수 없는 상황에서 기퍼드는 언더우드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다.
1890년 기퍼드 선교사는 제4대 정신여학교 교장이었던 M. H. 기퍼드와 결혼을 하였다. 기퍼드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선교여행을 떠나면 2-3개월은 기퍼드에게 임시로 새문안교회 설교를 맡기기도 하였다.
기퍼드 여 선교사는 정신여학교가 연못골로 옮기고 정신여학교에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기퍼드 선교사는 다시 시흥, 안성, 김포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만 이질에 걸려 조선에 온 지 12년 만인 1900년 4월 10일에 삶을 마감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았던 그의 부인 M. H. 기퍼드 교장은 그해 5월 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이들 부부의 묘비가 바로 양화진에 안장되어 예수의 재림만 기다리고 있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양화진에 묻혀 있는 정신여학교 제4대 교장 메리 해인드 기퍼드의 묘비. |
이 때 알렌은 의사의 자격증이 있으면 좋겠다고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받았던 엘러스는 보스턴의과대학에 진학을 하여 의술을 연마하였다. 의료선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춘 그는 1866년 벙커 선교사와 함께 조선 조정에서 운영하는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사역할 길무어(G. W, Gilmore, 길모), 헐버트(H. B. Hulbert), 벙커 등 선교사와 함께 한양에 도착하였다. 엘러스 의료선교사는 알렌이 책임자로 있는 광혜원에서 여성을 상대로 하는 의사가 됐다. 그녀가 한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민비가 병에 걸려 몹시 앓고 있었다.
알렌 선교사가 몇 차례 갔지만 민비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진료를 할 수가 없어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다행히 여자 의사인 엘러스가 광혜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연락하여 창덕궁에 머물고 있는 민비를 진료케 하였다. 엘러스는 민비의 병세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었으며, 알맞은 처방이 이루어지자 민비의 병은 곧 회복되었다. 그 후 엘러스 선교사는 민비와 궁궐로부터 신임을 받고 민비의 주치의가 되었다.
엘러스 선교사는 1886년에 내한하여 정동에서 생활을 하다가 1887년 6월에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한 명의 고아를 데리고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소문이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지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엘러스 선교사는 1888년 벙커(D. A. Bunker, 방거) 선교사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엘러스 선교사와 벙커 선교사는 부부 선교사가 되었다. 정동여학당은 1년이 지나자 학생이 많아졌으며, 1888년에는 헤이든(M. Haydon) 선교사가 2대 교장으로 잠시 재직하였다. 1890년에 도티(S. S. Doty) 선교사가 3대 교장으로 취임을 하면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종로5가 쪽에 있는 연지동에 자리를 잡고 정신여학교(현 정신여자 중고등학교)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할 수 있도록 기여했던 독지가 세브란스는 또다시 정신여학교를 신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관이라 부르게 됐으며, 현재 그 건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 벙커 선교사가 1894년 배재학당 부학당장으로 옮겨 가면서 장로교 선교사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신분이 변경되었다. 이 일로 엘러스도 감리교 선교사로 교파를 바꾸었다. 엘러스는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육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더욱이 정신여학당 출신이며 엘러스 교장의 지도 하에 교육을 잘 받았던 이들은 모두 YWCA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엘러스는 미국에 연락하여 조선 YWCA 설립을 위한 기금 5천엔(圓)을 희사받은 일도 있었다. 1926년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하였다가 1932년 남편이 사망하자 1937년 재차 입국하여 황해도 소래에 잠시 있다가, 1938년 서울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삶을 마감하자 선교부에서는 남편과 함께 양화진에 잠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88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한 기퍼드(D. L. Gifford, 기보) 선교사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낮선 이국땅인 서울에 도착하였다. 기퍼드 선교사는 조금도 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고 언더우드의 좋은 협력자로서 새문안교회를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당시에 언더우드는 선교구역이 서울로 제한받지 않고 황해도 소래지역과 평안도 의주지방을 자주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더욱이 평안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을 건너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설립했던 새문안교회를 비워 둘 수 없는 상황에서 기퍼드는 언더우드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다.
1890년 기퍼드 선교사는 제4대 정신여학교 교장이었던 M. H. 기퍼드와 결혼을 하였다. 기퍼드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선교여행을 떠나면 2-3개월은 기퍼드에게 임시로 새문안교회 설교를 맡기기도 하였다.
기퍼드 여 선교사는 정신여학교가 연못골로 옮기고 정신여학교에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기퍼드 선교사는 다시 시흥, 안성, 김포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만 이질에 걸려 조선에 온 지 12년 만인 1900년 4월 10일에 삶을 마감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았던 그의 부인 M. H. 기퍼드 교장은 그해 5월 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이들 부부의 묘비가 바로 양화진에 안장되어 예수의 재림만 기다리고 있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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