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헤론 선교사의 장례식도 눈물 겨웠지만 두번째 선교사가 양화진에 묻힐 때 그 울음소리는 더욱 컸다고 한다. 그날 참여했던 미국 남북 장로교회 선교사들과 미국 남북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모여 장례식을 거행할 때, 여자 선교사들의 울음소리는 유난히 큰 소리로 울렀기에 양화진 옆에 자리집고 있는 절두산(천주교 성지)에 메아리쳤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입국하기까지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공이 컸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2년 안식년을 맞아 일시 귀국하여, 쉬는 것도 잊은 채 미국 시카코 맥코믹 신학교에서 조선 선교 보고회를 가졌으며, 다시 내쉬빌에서 모인 미국신학생 선교대회에 초청을 받고 이곳에서 조선의 문화, 습관 등 여러 가지의 문제점 등을 보고했다. 이 때 손을 들고 나선 신학생이 있었다.

“선교사님, 저는 유니온 신학교에 다니는 레이놀즈라고 합니다. 제가 조선에 가서 선교사역을 하겠습니다.”

레이놀즈 신학생이 손을 들고 선교사로 지원을 하자 역시 같은 신학교 학생인 전킨 등이 지원하고 나섰다. 이렇게 언더우드 선교사의 보고에 은혜를 받고 지원자가 속출하여 드디어 7명(테이트 남매, 전킨 부부, 레이놀즈 부부, 데이비스)이 지원을 하게 됐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들이 소속되어 있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허락을 받았고, 1892년 7월 7명의 선발대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일본 요꼬하마를 거쳐 1892년 11월 서울 서대문밖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들이 어학 훈련을 받은 후 레이놀즈(W. D. Reynolds, 이눌서)는 1893년 6월에 자신의 조수이며 어학교사인 정해원을 전주에 파송하였다. 선교사 주택을 마련하고 인근 주민들에게 전도를 하고 정해원 조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전주 서문교회의 시작이 됐다.

1895년에 제2진으로 벨(E. Bell. 배유지), 하리슨(W. Harrison. 하위렴)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1897년 전남지방 중심지였던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밤낮 가리지 않고 항의 소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야, 서양 귀신들아. 여기는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곳인데 썩 물러나지 않으면 당장 불을 질러 태워 버리겠다.”

이 말에 놀란 배유지 선교사는 곧 철수를 하고 목포가 곧 개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조사인 변창연을 목포에 땅을 구하여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하기로 하였다. 즉시 변창연 조사는 목포에 도착하여 토지를 매입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목포 중심지는 일본인들이 매입해 버렸기에 할 수 없이 외딴 지역 초분(草墳) 공동묘지 한쪽에 자리를 잡고 1897년 목포교회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린 것이 목포 양동교회의 시작이 됐다.

1년 후인 1898년에 배유지 선교사는 부인 로티(Lotee Witherspoon, 1867-1901) 선교사와 자녀 2명, 그리고 오웬(C. C. Owen, 오원) 선교사와 함께 목포지방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정책협의회 차 전주에 머물고 있던 1901년 4월 12일 로티 선교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급히 목포에 도착해 방문을 열고 엄마 곁에서 울고 있던 두 자녀를 본 배유지 선교사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배유지 선교사는 곧 서울에 있는 언더우드에게 연락을 하였다. 이 때 언더우드는 깜짝 놀라면서 “아이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 큰일이구나. 즉시 시신을 상선에 싣고 서울로 운구하라”는 말을 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두 자녀를 안고 오원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였다. 언더우드의 집례로 양화진에 그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부인을 땅에 묻는 순간 배유지 선교사는 체면 불구하고 목놓아 울고 말았다.

“여보, 두 자녀를 놔두고 무심하게 가버립니까!”

겨우 동료들의 부측으로 일어난 배유지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양화진을 떠났다. 그는 잠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 머물러 도미할 준비를 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잠시 두 자녀를 미국에 맡기고 오겠다면서 그해 5월에 인천항을 떠나 미국 켄터키로 향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약속대로 두 자녀를 부모에게 맡기고, 다시 목포에서 선교를 하기 위해서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을 하자 그 길로 부인이 잠들고 있는 양화진을 향하여 달려 갔었다. 두 송이의 국화꽃을 준비하여 한 송이는 헤론 선교사 묘비 앞에, 다른 한 송이는 로티 선교사 앞에 놓았다. 그날따라 쌀쌀한 늦가을 날씨였지만 헤론 선교사의 묘비와 로티 선교사의 묘비는 그렇게 찬란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니라(요 12:24)”

분명히 성경구절을 기억했던 배유지 선교사는 부인의 묘비 앞에서 몇 번이고 눈시울을 적시면서 해가 서쪽 하늘로 붉게 지는 모습을 보고 양화진을 뻐져 나왔다. 다시 정신을 차린 배유지 선교사는 부인과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천 제물포에서 목포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여 목포로 향하였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