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는 (롬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데 잘못된 잣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상대적인 의로움이라는 잣대입니다. 1000만원 훔친 도적이 1억 훔친 도적을 향해 ‘에이 도둑놈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은 진리로 우리를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리에 눈이 멀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약점에 대해 얼마나 잘 아십니까?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약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저도 저의 약점에 대해서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제가 게으르면서도 ‘안 게으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누가 게으른 것을 보면 금방 ‘저사람 게으르다’ 하고 판단하는 것은 바로 제가 게으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것을 보면서 ‘교만하구만’ 하고 성급히 정죄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러한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역설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자신이 싫어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통렬하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어떤 죄에 대해서 심하게 정죄하는 모습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죄를 너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건 긍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도 그러한 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성실하고 거룩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신도 동일한 어두운 생각과 범죄를 하는 모습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인체 하고 다니고 있는 것일 뿐. 이것은 위선과 허위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그 내면 속에는 동일한 세상과 죄들에 대한 동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기준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혹시 잘못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입니다.

세 번째는 (롬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즉 판단하는 사람은 그 판단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더 훌륭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함으로 하나님 앞에 점수 한 포인트 더 얻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는 ‘그 판단을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판단 받음을 피할 줄로 생각 하느냐?’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우월의식에 우쭐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열외의식'입니다. 말씀 앞에 자기를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정죄하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문열씨의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자유당 말기 혼란 속에서 아버지의 시골발령으로 시골학교로 전학 온 한병태는 학급을 휘어잡고 힘을 휘두르는 엄석대에게 강한 불만과 반감을 나타냅니다. 반장을 맡고 있던 엄석대의 절대적인 힘 앞에 아이들은 반찬을 갖다 바치기도 하고, 물 당번을 정해 물시중까지 들고 있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신 시험을 쳐주기도 합니다. 다른 아이들의 물건을 거의 강제로 빼앗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러한 체제에 빌붙거나 순응한 채 살아갑니다.

한병태는 엄석대의 횡포와 억압에 맞섭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연합해서 괴롭힘으로 한병태를 철저하게 고립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은밀한 위협과 거절할 수 없는 회유공작을 합니다. 결국 한병태는 외로운 저항을 하다가 살아남기 위해 타협을 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면서 한병태 역시 엄석대 밑에서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그냥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4.19로 온 사회에 변화의 물결이 이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젊은 선생님이 반을 맡게 됩니다. 새 선생님을 엄석대를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분위기의 잘못됨을 느끼고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권력이 몰락하는 기미를 눈치 챈 아이들은 앞 다투어 엄석대의 잘못을 일러바치게 됩니다. 그 반의 권력자에서 문제아로 몰락한 석대는 모욕감을 느끼며 교실을 뛰쳐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한병태는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엄석대의 모습을 보면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물론 이 소설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글입니다. 엄석대나, 한병태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교사 속의 또 다른 독재자의 모습 등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사람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엄석대도, 한병태도, 새로운 교사도 다른 사람을 개혁하고자 하지만 먼저 자기 안에 개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적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열외 시키는 것이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 말씀 앞에 제일 열외의식을 많이 갖느냐 하면 바로 제 자신입니다. 목회자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전통에 아주 익숙한 분들 속에 있는 열외의식을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앞에 어떤 직분과 사회적인 위치와 지식을 근거로 자기를 열외 시킬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자기 적용을 하지 않는 열외의식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로, 권사가 라고 정죄하는 분들 속에 있는 자기 열외의식을 버리실 수 있기 바랍니다.

네 번째는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남을 판단하기에 발 빠른고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잘못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멸시한다. 다른 말로하면 경멸한다는 것입니다. 무시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대단해’라고 자위합니다. 또 ‘나는 그럴만해,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생각하시는 것이 틀림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가면 자신들이 죄가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죄가 없을 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심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오용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 하신다면 아마 여기서 살아남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것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목적은 바로 우리가 회개에 이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의 축복하신 목적은 바로 여러분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하는구나’라는 동기를 불어 넣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탕자를 변하게 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전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위에서 제 목회비전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율법적인 신앙에서 자율적인 신앙으로, ‘죽으면 지옥갑니다’라는 공포적인 설교에서 공감되는 설교로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에서 기뻐서, 감사해서로 여러분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 변화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새 교회를 목회할 방향입니다. 훼더럴웨이 교민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영적인 유익함을 우리교회가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인내하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변화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느냐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가 못났습니까? 얼마나 부족합니까?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십시오. 이 축복 여러분에게도 임할 축복입니다. 우리가 전할 메세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자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메세지를 전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정죄하기를 즐겨한 사람의 결과는 어떨 것일까요?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막아놓으신 진노의 댐이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두 지 중에 하나를 쌓습니다. 진노를 쌓을 것인가? 아니면 마태복음 6장 말씀처럼 천국에 보물을 쌓을 것인가? 여러분 남을 정죄하기에는 빠르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판단의 잣대는 올바릅니까? 혹시 우리가 이러한 판단으로 우리가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잘못 해석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도 부족합니다. 심판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실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러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면 또 그러한 것을 지금 깨달았다면 겸손히 이 시간 마음을 열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새교회 원호 목사 음성 설교 http://ncfw.org